뿌리를 찾아서(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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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 高句麗碑(중원고구려비)
소 재 지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立石(입석) 마을 지정번호 : 국보 제205호 [중원고구려비각 과 주변 전경]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옆 모형碑(비)]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빼앗은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합니다. [중원고구려비각 전경] 이 비는 고구려 廣開土大王碑(광개토태..
2016.02.16 -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묘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1번지 [바우덕이 묘와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에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한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이곳 안성 청용리 불당골 마지막 산동내 개울 건너 가파른 산허리엔 유명한 사당패 바우덕이라는 23세의 꽂다운 女人이 묻힌 墓가 있는 곳이다. 생전의 바우덕이가 줄타기를 하듯 바우덕이의 묘로 오르는 돌계단도 가파르다. [碑(비) 옆면에 새겨진 글] 바우덕이는 1848년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하여 1853년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 남사당 에 당시 5세로 입당하여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
2016.02.12 -
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興德王陵(흥덕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사적 30호 [왕릉 가는 길 솔숲] 신라 제42대 興德王(흥덕왕, 826~836 재위)의 본명은 金秀宗(김수종), 景徽(경휘)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惠忠太子(혜충태자) 仁謙(인겸)이며, 어머니는 聖穆太后 金氏(성목태후 김씨)이다. 妃(비)는 소성왕의 딸인 章和夫人 金氏(장화부인 김씨)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定穆王后(정목왕후)로 추봉되었다. [왕릉가는 길 솔숲 2] 즉위 후 당나라 文宗(문종)으로부터 신라왕에 봉해졌으며, 828년 대아찬 金祐徵(김우징)을 시중으로 삼았다. 그해 張保皐(장보고)를 淸海鎭大使(청해진대사)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았다.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金大廉(김대렴)이 茶(차)종자를 가지..
2016.02.11 -
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崇信殿(숭신전)과 昔脫解王陵(석탈해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350-7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55호 [崇信殿(숭신전) 전경] 광무 2년(1898)에 군수 권상문이 신라 제4대 임금인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고 이때부터 '崇信殿(숭신전)'이라 불렀다. 처음 지을 때 월성 안에 있던 것을 1980년 월성 안의 민가 철거와 함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으며 봄, 가을과 춘분, 추분에 걸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안내판 글 내용] [新羅昔脫解王碑閣(신라탈해왕릉비각)] 1921년에 세운 '新羅昔脫解王碑銘(신라석탈해왕비명)' 이라는 비와 비각이 있다. [新羅昔脫解王碑(신라탈해왕릉비)] 비의 내용은 金允植(김윤식)이 짓고 글씨는 尹用求(윤용구)가, 전서는 崔鉉弼..
2016.01.30 -
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法興王陵(법흥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산 63 사적 제 176호 [法興王陵(법흥왕릉)과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좌측에서 담은 法興王陵(법흥왕릉) 전경] 지금의 법흥왕릉은 1966년과 1968년 도굴되었던 봉분을 복원한 것이며, 다른 왕릉에 비해 작은 규모이지만, 봉분주위에 호석을 두른 흔적이 남아 있어신라왕릉에 관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한다.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年號(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법흥왕 15년(528)에는 불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정하였다. 주변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나, 신라에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의 능으로서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정면에서 담은 法興王陵(법흥왕릉) 전경]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왕이 돌아가시니 諡號(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哀公寺(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
2016.01.29 -
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元聖王(원성왕) 괘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사적 제26호 [元聖王(원성왕) 괘릉 안내판 글 내용] [元聖王(원성왕) 괘릉 석상과 석주 안내판 글 내용] [元聖王(원성왕) 괘릉과 석상 문인석 전경] 경주에는 고분과 릉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주인을 아는 릉은 몇 안된다 '掛陵(괘릉)'이란 뜻은 능을 걸다라는 의미인데 이곳에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 곳을 메우고 능을 마련했는데, 능 내부의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元聖王(원성왕) 괘릉 전경] 예전 제가 다녀올 때는 괘릉이라 하였지만, 지금은 원성왕릉으로 바뀐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렸졌다. 괘릉의 릉 주인에 대해서는 '三國遺事(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元聖王..
2016.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