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原 高句麗碑(중원고구려비)

2016. 2. 16. 06:35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 재 지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立石(입석) 마을
지정번호 : 국보 제205호

 

[중원고구려비각 과 주변 전경]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옆 모형碑(비)]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빼앗은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합니다.

 

 

[중원고구려비각 전경]

 

이 비는 고구려 廣開土大王碑(광개토태왕비)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때문에 이 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의 건립은 장수왕 후기인
5세기 말엽에 세워진 것으로, 고구려의 남방 진출을
보여주는 척경비로 간주한다.

 

 

[중원고구려비각]

 

비문에는 태자 이하 주부, 당주 등
여러 명의 수가신의 명단이 나타나 있으며,
인명 표기는 출신부, 관계, 인명, 관직의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대사자나 발위 사자와 같은
사자의 분화된 명칭을 보여 주고 있어
6세기 이후에 보여지는 문헌의 오류를 사정해 주고 있다.

 

 

[비문 풀이 안내글 내용]

 

장수왕의 南進 巡狩碑(남진 순수비)로,
화강암으로 된 비석의 사면에 예서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중원고구려비]

 

이 비석에는 고구려, 뱍재, 신라 간의
정치적 동향을 나타내는 내용과, 특히 고구려 세력의
남방 한계를 실증해 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고구려와 신라 간의 우호적 맹약을 어긴
신라가 결국은 고구려 측의 요구를 수락하여
고구려의 입장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신라에 있어서, 5세기 후엽까지 고구려 세력의 영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중원비에는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라는 것과
신라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것,
신라의 왕을 매금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적혀 있었다.


매금이란 뜻은  침대보,
또는 말 고삐를 잡고 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매금은 신라의 왕을 매우 낮추어서 부르는 말이라한다.

 

 

[중원고구려비각과 안내판 전경]

 

중원고구려비는 1972년 전국을 강타한 대홍수때
하마터면 영영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물에 잠긴 마을을 복구한 뒤
비석을 일으켜 세우고 칠전팔기 정신으로
단합했다는 의미로 구호비를 세웠다.


'만약 이 입석이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면
중원고구려비는 디딤돌 석재로 영영 사라졌을 것'
이라한다.

 
'중원고구려비가 역사의 상징물로 힘겹게 살아남아온 데 비해
우리는 이 비를 너무 홀대하고 있다'
며 관심있는 사람들은 아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