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9. 06:51ㆍ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40 번지
[六臣祠 (육신사)전경과 홍살문]
충절문을 통과하여 마을 끝머리에 사육신 사당이 있다.
이 정자는 1479년 성종10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건립한 것이다.
원래는 종가안에 있던 별당 건물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선조25년에 불타고 일부만 남아있었는데,
이를 1614년 광해군6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한다.
1981년에 새로이 건립한 건물은 이삼문. 삼층각. 숭절당. 등이
있으며, 사육신으로 일컬어지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 기념비와 朴彭年(박팽년)의
유일한 유복손인 박일산이 창건한 태고정 보물제554호가 있다.
[六臣祠(육신사)]
육신사 현판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라한다.
사육신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은 처음에는
박팽년만 후손에 의해 배향되다가 선생의 현손인 계창공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인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한다.
朴彭年(박팽년)의 자는 仁讐(인수), 호는 醉琴軒(취금헌).
시호는 忠正(충정). 본관 順天(순천) 閑碩堂(한석당) 中林(중림)의 아들.
1434년(세종 16)문과에 급제, 成三問(성삼문)등과 함께
集賢殿(집현전)학사가 되어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의 유명을 받아 皇甫仁(황보인) 金宗瑞(김종서)등과 함께
문종을 보필하였으나,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돌아가실 때 顧命(고명)을 받아
어린 단종을 보살피다,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 수양대군(世祖)이 황보인, 김종서와
안평대군(세종의 삼남)을 죽이고 왕위를 찬달하였다.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 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잡혔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세조가 김질을 옥중으로 보내어 모의사실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했다.
마지못한 세조가 親鞠(친국)을 하게 되는데 자신을 상감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 라고 대답을 하니 세조가 노하여 네가 이미 나에게 臣(신)이라
칭하였거늘 "이제와서 나를 상감이라 하지 않느냐?"고 하자
나는 상왕(上王,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다고 하였다.
과연 충청관찰사로 있을 때에 올린 狀啓(장계 : 외직에 있는 관원이 왕에게 올리던 글)에
신(臣)자를 써야 할 곳에 거(巨)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노한 세조는 그러면 "내가 주는 녹봉(祿俸)은 받지 않았느냐"고
하자 한 톨의 곡식도 받지 않았다고 하여 확인하여 보니 충청 감영 창고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에 더욱 노한 세조의 혹독한 고문으로 8일만에
옥중에서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부친은 물론 4형제와 아들 3형제가
모두 처형되었으며, 남은 가족은 대역죄인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가 되거나 관비가 되어 끌려가고 말았다.
온 집안이 멸문의 화를 입을 때 그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 이씨도 관비가 되어 친정동네로 내려왔으며,
그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음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로 삼게 되어 있었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고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기를 바꾸어 키워 아이는 목숨을 보존하였다 한다.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朴婢(박비)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가 17세가 되었을때 그의 이모부 李克均(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렸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
이 때에 조정에서는 사육신들에 대해 옳은 일을 했다는
여론이 일고 있어서 서울로 올라간 박비는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돌아왔고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 받아
宗宅(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했으며 이 사람이 바로 사육신
여섯 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朴一珊(박일산)이
묘골 순천 박씨 입향시조가 되었다.
1979년에 '육선생사적비건림위원회'에서 세운 육각비가
각 면마다 육신의 행적을 銘記(명기)하였다.
[숭정사의 외삼문인 성인문]
숭정사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성인문을 들어가야 숭전사가 있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사진으로 담진 못하였다.
[崇節堂(숭절당)]
崇節堂(숭절당) 숭정사 앞에 제사에 소요되는 건물로서
안채 하나와 사랑채 둘로 구성되어 있으나 모두 100년이 넘지 않은 건물이다.
[太古亭(태고정)]
보물 제554호
오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은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상이 종택을 세울때 그에 딸린
정자로 지었다는 太古亭(태고정)이다.
太古亭(태고정)은 일명 一是褸(일시루)고도 불려서
정자의 정면에 '太古亭'과 '一是褸' 두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1479년에 세우졌고 임진왜란때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614년에 중건되었으며, 400년 가까이 되는 건물이다.
[太古亭(태고정) 一是褸(일시루)]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온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박팽년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의 지침이 되었으면 한다.
朴澎年(박팽년 1417~1456) 자는 인수(仁讐). 호는 醉琴軒(취금헌).
1434년(세종16) 謁星文科(알성문과)에 급제,
성상문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5(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成三問(성삼문), 河緯地(하위지),
李塏(이개), 柳誠源(유성원) 兪應부(유응부)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이때에 함께 화를 이들을 일컬어 死六臣(사육신)이라 하였다.
1691년(숙종17) 신원되었고 1758(영조34)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忠正(충정)이란 시호를 내리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저서로는 [醉琴軒千字文(취금헌천자문)] 있다.
[陶谷齎(도곡재)]
유형문화재 제32호
소재지 :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
도곡재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집이다.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陶谷(도곡) 朴宗祐(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
도곡재라 이름하였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사람으로 문장 절의 덕행을 모두 겸비하여
東韓(동한)의 일인자라 칭송받았으며 達城十賢(달성십현)의 한 사람이다.
[육신사에서 내려다 본 정경]
시는 이 일대 9만 2천260평에 국비와 시. 군비등
180억원을 들여 인근 20가구를 전통 한옥 마을로 정비하고
충절문과 사육신기념관 등을 세울 계획이다.
그러나 주민반대, 예산부족등 현실적인 벽에 부닥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육신사 인근 묘골마을의 경우, 외지에 사는 일부 집주인들은
허물어진 집을 정비하거나 공터에 새로 한옥을 지을 경우 1가구 2주택등
다주택 가구가 되어 세금 부담이 만만치 않다며, 반대하고 있다 한다.
묘골마을은 국가 지정 문화재가 아니어서
소득세법상 양도소득세 경감등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없고,
한옥과 양옥이 혼재하는 등 전통 가옥 집단촌이 아니어서
문화재로 지정 받기도 힘든 실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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