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30. 06:38ㆍ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350-7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55호
[崇信殿(숭신전) 전경]
광무 2년(1898)에 군수 권상문이 신라 제4대
임금인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고 이때부터 '崇信殿(숭신전)'이라 불렀다.
처음 지을 때 월성 안에 있던 것을 1980년
월성 안의 민가 철거와 함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으며 봄, 가을과 춘분, 추분에 걸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안내판 글 내용]
[新羅昔脫解王碑閣(신라탈해왕릉비각)]
1921년에 세운
'新羅昔脫解王碑銘(신라석탈해왕비명)'
이라는 비와 비각이 있다.
[新羅昔脫解王碑(신라탈해왕릉비)]
비의 내용은 金允植(김윤식)이 짓고
글씨는 尹用求(윤용구)가, 전서는 崔鉉弼(최현필)이 썼다.
숭신전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신라 석탈해왕의
祠堂(사당). 조선 고종 30년(1893)에 국비로 세웠다.
숭신전을 향해 永寧門(영령문)을 들어서면
양 옆에 尙義齋(상의재)와 象仁齋(상인재)가 있으나,
마침 월요일이라...문이 닫혀있고 쉬는 날이라 들어가지는
못하여서 밖에서만 담아올립니다.
[昔脫解王陵(탈해왕릉) 가는 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산 17
사적 제 174호
탈해왕릉은 비비꼬인 소나무가 우거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곧게 자라지 못하고 틀어진 소나무지만, 그 모습이 신비롭기도 했다.
[안내판 한글, 중국어 글 내용]
[안내판 영어, 일어 글 내용]
[솔숲사이로 보이는 昔脫解王陵(석탈해왕릉) 전경]
이 능은 신라 제 4대 脫解王(탈해왕, 재위 57~80)을 모신 곳이다.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본래 왜국 동북 1천여리에 위치한
多婆那國(다파나국) 출신으로 그 나라 왕비가 알을 낳으니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궤에 넣어
바다에 띄어 보냈다.
[昔脫解王陵(탈해왕릉) 전경]
처음에 金官國(금관국, 김해)에 닿았으나 아무도 거두지 않았다.
계속 표류하던 궤는 辰韓(진한)의 阿珍浦(아진포)에 닿았고,
한 노파가 거두어 키웠는데 처음 궤짝이 떠올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鵲(작)자에서 조를 떼어버리고
昔(석)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어 나왔다하여
이름을 脫解(탈해)라 하였다 한다.
[昔脫解王陵(탈해왕릉)과 표석비]
탈해는 자라서 키가 9척이나 되었으며,
용모가 준수하고 지식이 남달리 뛰어나 신라 2대왕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3대 유리왕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昔脫解王陵(탈해왕릉)]
봉분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으며, 호석을 설치했던
흔적도 외형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한다.
지금 놓여있는 상석도 후대에 설치한것이라한다.
[昔脫解王陵(탈해왕릉)]
기록에는 재위 24년에 왕이 돌아가니 성 북쪽
壤井丘(양정구)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또는 疏川丘(소천구)
속에 장사지냈다고도 하였으나 양정구나 소천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에서 탈해왕 시기에 이와 같은 봉토분은 출현하지 않았으며
그 위치로 보아 매장주체는 橫穴式(횡혈식) 석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昔脫解王陵(탈해왕릉) 2]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이르기를
"나의 뼈를 파내어 塑像(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모시어라"했다.
그 후 토함산을 지키는 동악신이 되었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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