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元聖王(원성왕) 괘릉

2016. 1. 28. 15:12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사적 제26호

 

 

[元聖王(원성왕) 괘릉 안내판 글 내용]

 

[元聖王(원성왕) 괘릉 석상과 석주 안내판 글 내용]

 

[元聖王(원성왕) 괘릉과 석상 문인석 전경]

 

경주에는 고분과 릉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주인을 아는 릉은 몇 안된다

'掛陵(괘릉)'이란 뜻은 능을 걸다라는 의미인데

이곳에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 곳을 메우고 능을 마련했는데, 능 내부의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元聖王(원성왕) 괘릉 전경]

 

예전 제가 다녀올 때는 괘릉이라 하였지만,

지금은 원성왕릉으로 바뀐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렸졌다.

 

괘릉의 릉 주인에 대해서는

'三國遺事(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元聖王(원성왕)'의 陵(릉) 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무인석]

 

괘릉 입구에 있는 석상과 석주들이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어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한 인상을 주는 무인상은 얼굴생김이나 표정, 수염 등으로 보아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것으로 판단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국제적인 교역관계를 생각케 하는 데서 주목을 끈다.

 

괘릉무인석의 경우 이란인이라는 추측이 있다.

사산 제국이 망하면서 당나라로 망명한 귀족들 중 일부가

신라로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네요.

 

사산조 말기 귀족과 비교하면 대략적 복식의 형태는 유사해 보인다 합니다. 

 

 

[문인석]

 

입구 양쪽에 서 있는 문인석...

문관복장인데 칼을 차고 있는 게 조각되어 있다.

 

해설에 의하면 워낙이 평화로운 시대였기에

무관이지만  문관 복 안에 칼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돌사자상]

 

돌사자상이 릉 앞에 배치되어 있다.
빙그레 웃고 있는 표정의 돌사자상의 모습이 신기하다.

 

 

[원성왕릉(괘릉)]

 

사적 제26호. 원형의 봉토분으로 앞에 석상을 놓았고,

아랫부분의 주위에는 다듬은 석재로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좌측옆에서 담은 전경]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호석은 지대석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의 판석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을 얹었고, 각 판석 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키는 탱석을 끼워 넣었으며 12지신상을 2개의 판석마다 하나씩 배치했다.

 

 

[석상과 ]

 

봉분 주위에 이렇게 12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며, 특히 괘릉의 12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릉 주변 둘레석]

 

릉을 빙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 일품이다.

 

 

[릉 뒤에서 담은 전경]

 

신라 제38대 왕(재위 785∼798).

諱()는 敬信(경신)이며, 내물왕의 12세손이다.

 

788년에 독서출신과를 두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한편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에도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