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8. 06:38ㆍ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 79-2
사적 제 182호
[입구쪽 안내 팻말과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선덕여왕 표석비]
신라 제27대 善德女王(선덕여왕, 재위 632-647)은
본명이 德曼(덕만)이며 眞平王(진평왕)과
어머니 摩耶夫人(마야부인)의 딸로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和白會議(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聖祖皇姑(성조황고)란 호를 올렸으니 그 해가 바로 당 태종 6년이다.
[솔숲 사이로 보이는 선덕여왕릉 전경]
재위기간에는 唐(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정에 힘썼다.
634년에 年號(연호)를 仁平(인평)으로 고쳤다.
慈藏法師(자장법사)의 청에 의해 645년에
龍寺九層塔( 황룡사구층탑)을 세우고, 芬皇寺(분황사)와
瞻星臺(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한 金庾信(김유신)과 金春秋(김춘추)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선덕여왕릉과 안내판 전경]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으로 되어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647년 1월에 왕이 죽자 諡號(시호)를 善德(선덕)이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낭산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안내판 글 내용]
[善德女王陵(선덕여왕릉)]
선덕여왕은 知幾三事(지기삼사)로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첫째는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 예언하였다.
그림과 함께 보내온 씨앗을 궁전 뜰에 심어보았더니 과연
꽃이 피고 지기까지 향기가 없었다.
둘째는 여근곡에 얽힌 이야기이다.
추운 겨울날 영묘사의 옥문지에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시끄럽게
울어 댄다는 얘기를 듣자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군사 2천을 주어 서쪽 교외에
여근곡이란 곳에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무찌르도록 명령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서 각각 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달려가서 물으니
과연 여근곡이란 골이 있고 그 곳에 백제장군 우소가 이끄는 군사가 숨어있슴을 발견하여
섬멸하고 후속부대 1천3백여 명 마저 무찔렀다는 고사다.
셋째는 여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낭산 양지에 남향으로 장사지냈다.
[릉 뒤에서]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릉 우측 옆 묘비와 표석비]
선덕여왕이 생존해 있을 때 신하들이
모란꽃과 개구리에 관한 예언을 두고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수 있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왕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꽃을 그린 그림에 나비가 함께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향기가 없기 때문인데, 이는 당나라의 임금이
내가 여자로서 짝이 없이 독신으로 지내는 걸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는 눈이 불거져 나와 성난 형상으로
병사의 상징이며 옥문이란 곧 여근인데 그 빛깔은 희다면
서쪽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의 병사가 서쪽의 여근곡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
그들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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