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神武王陵,(신무왕릉)

2015. 12. 14. 06:30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660

사적 185호

 

[신무왕릉 출입문 전경]

 

능 주변은 담장이 쳐 있고 담과 담 사이 작은 철문이 있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아 열고 들어갈 수가 있어 좋았다.

 

 

[안내판 글 내용]

 

[철문을 들어서자 곧장 멀리 보이는 神武王陵,(신무왕릉) 전경]

 

흥덕왕의 이름은 金祐徵(김우징).

아버지는 상대등 均貞(균정)이며, 제43대 희강왕의 從弟(종제)이다.

어머니는 眞矯夫人(진교부인) 박씨이고, 비는 眞從夫人(진종부인)이다.

 

 

[줌으로 당겨 담은 神武王陵,(신무왕릉) 전경]

 

흥덕왕 3년(828) 大阿飡(대아찬)으로 侍中(시중)에 임명되었다.

831년 면직된 뒤 834년 다시 시중이 되었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상대등에 임명되자 사임했다.

 

836년 흥덕왕이 돌아가신 뒤, 아버지인 균정과 悌隆(제륭:뒤에 희강왕)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제륭을 추대한 金明(김명:뒤에 민애왕),

利弘(이홍) 등과 싸웠으나 아버지가 전사하는 등 대패하자 金陽(김양)과 함께

淸海鎭(청해진)의 張保皐(장보고)에게 피해갔다.

 

 

[神武王陵,(신무왕릉)]

 

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이자 장보고의 병력지원으로
민애왕을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839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할아버지는 惠康大王(혜강대왕), 아버지는 成德大王(성덕대왕),

어머니는 憲穆太后(헌목태후)로 각각 추봉했다.

또한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장보고를 感義軍使(감의군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즉위한지 3개월만에 병사함으로 의 단명 왕이 되었다.

 

 

[神武王陵,(신무왕릉)]

 

능앞 表石(표석)과 대형 魂遊石(혼유석)

향로석과 주대석 등이 있으나, 혼유석을 제외한

다른 석물들은 최근에 만든것 같다 하네요.

 

혼유석 앞 拜石(배석)이 있는 것은과 혼유석

아래 부분 정면에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합니다.

 

 

[神武王陵,(신무왕릉) 표석]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다.
그리고 그 흔한 무인석이나, 문인석도...

 

 

[정면에서 담은 神武王陵,(신무왕릉)]

 

장보고는 신무왕에게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들겠다는

밀약을 받지만 신무왕이 일찍 죽어, 그의 아들 문성왕을 세운다.

 

문성왕은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맞아들이려 하지만 천한 신분이라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장보고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왕실과 신하들은 염장을 시켜 암살한다. 

청해진의 막강한 힘을 경험한 터라 장보고를 암살한 것으로도 부족하여

후환을 없애기 위해 청해진마저 해체한다.

 

결과적으로 문성왕은 자신을 지지해줄

절대적인 버팀목이 사라져 귀족을 견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청해진이 없어졌으니 해적들이 창궐하여

당과 왜의 무역을 관리할 수단도 없어지게 되었다.

 

 

[릉 좌측 철망과 대나무 숲]

 

일반 왕릉에 비하면 작다는 것이지 일반인의 묘에 비하면 크다.

신라 제45대 왕 김우징의 무덤으로 괘릉 원성왕의 증손이라고 전해온다.

 

[릉 우측 철망과 대나무 숲] 

 

야트막한 구릉에 오래된 적송과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릉안에서 담은 안내판과 출입구(철문) 전경]

 

산기슭 약간 경사진 지점을 이용하여 분묘를

축조했는데 아무런 부대시설이 없는 원형봉토분이다.

 

돌아가신 후 弟兄山(제형산) 서북에 장사지냈다는

三國史記(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이곳일것이라 짐작하지만,

이 무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다.

 

인근에서도 예로부터 이 분묘를 신무왕릉이라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