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9. 06:19ㆍ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사적 제 180호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글 내용]
[나무테그 다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진평왕릉으로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한다.
눈내린 그 다음 다음날인대도 음달진 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진평왕릉 가는 길]
眞平王(진평왕, 재위 579년~632년)은 신라의 제26대 임금이다.
성은 金(김), 휘는 白淨(백정).
중국측 사서에는 眞平(진평)으로 기록되어있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銅輪(동륜)이며,
어머니는 立宗葛文王(입종갈문왕)의 딸인 萬呼夫人金氏(만호부인김씨)이다.
先妃(선비)는 福勝葛文王(복승갈문왕)의 딸인
摩耶夫人金氏(마야부인김씨)이고,
後妃(후비)는 僧滿夫人孫氏(승만부인손씨)이다.
[노거수]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신체가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으며, 신장이 11척에 달했다한다.
[노거수와 진평왕릉 전경]
진흥왕에 이어 왕권을 성장시켜갔는데 54년이란 신라역사상
가장 오랜 재위기간 동안 고대왕조의 관료체제를 완비하였다.
치세 초기부터 자신의 동생들을 비롯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제도 개혁에 힘쓰는 한편, 수, 당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되돌아 담아 본 노거수 전경]
그러나 중반 이후에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
격화되어 백성들이 자녀를 내다파는 일 등이 벌어졌다.
말년에는 칠숙의 반란을 겪었다.
삼국사기는 정확한 사망 연대에 대해서 칠숙의 난이 일어난
631년과 이듬해인 632년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노거수로 둘러쌓인 진평왕릉 뒤 전경]
승려들을 중국 대륙으로 보내 불법을 배우는 한편,
591년 7월에 南山城(남산성)을 쌓고, 593년 7월에는 明活城(명활성)과
西兄山城(서형산성)을 고쳐 쌓는 등 국방을 충실히 하였으며,
佛事(불사)뿐만 아니라 국사에도 참여하도록 해 호국불교의 확립에 기여했다.
602년 8월에는 백제군이 阿莫城(아막성)을 공격하기에
군사를 보내 격파하였으나 貴山(귀산) 등 장수들이 죽었다.
603년 8월에는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에 쳐들어왔다.
이에 왕이 친히 군사를 끌고 상대하였다.
[진평왕릉 뒤 전경]
608년에는 원광을 수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乞師表(걸사표)를 짓게 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아,
2월에는 북쪽 변방의 백성 8천 명을 사로잡고, 4월에는 牛鳴山城(우명산성)을 빼앗겼다.
3년 뒤 실제로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병력으로 원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릉 가는 길 옆 개울]
결국 진평왕은 54년이란 기나긴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회복시키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만들었다.
성골계통이 이어가던 신라왕조 진평왕을 기점으로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632년에 죽자 漢只(한지)에 장사 지냈으며
당 태종으로부터 左光祿大夫(좌광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진평왕릉 정면 전경]
九黃洞(구황동) 3층석탑의 동쪽, 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있다.
그 동쪽에 明活山(명활산) 남쪽에 보문사터가 있으며,
서쪽에는 狼山(낭산)이 솟아 있다.
表飾儀物(표식의물)이 없는 밑둘레 약 10m, 높이 약 7m의
원형 토분으로, 릉 주위에는 몇 그루의 나무들만 릉을 보호하듯 둘러 있었다.
[왕릉 앞 상석과 묘비 전경]
[진평왕릉 안내판 글 내용]
[상석과 묘비 전경]
진평왕은 딸만 셋을 두었는데, 덕만, 천명, 선화이다.
덕만 공주는 너무나 잘알고있는 선덕여왕이다.
우리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사람이다
천명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이다.
일찍 사촌인 용춘과 결혼해서 김춘추를 낳았으며, 김춘추는 신라역사상
최초의 진골출신왕이며 김유신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묘비]
선화공주는 그유명한 서동의 아내이다.
무왕(서동)은 백제역사상 신라를 제일많이 공격한왕이다.
장인의 나라를 수없이많이 그러나 부부의사랑은 남달랐다고한다.
불행하게도 아들 의자왕에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진평왕릉]
무왕(서동)과 선화공주(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딸)에 관한 이야기
일연 스님이 쓴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백제 무왕은 왕이 되기 전, 마를 캐다 팔아 홀어머니와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뱅이였다.
그래서 '마 캐는 아이'란 뜻으로 '서동'이라 불렸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막내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주며 노래를 가르쳤다.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노래는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과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진노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보냈으며,
기다리던 서동은 공주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함께 백제로 가 살았다.
[진평왕릉 전경 전경]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실린 이 글은 사실일까요?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면 그 유명한 선덕여왕의 동생이 된다.
그리고 진평왕 때는 백제와 신라가 사이가 아주 나빴던 시기였다.
그런 때에 백제사람과 신라사람이 결혼을 했다면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니 반드시 역사책에 기록됐을 텐데,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웬일인지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내용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왕릉 주위의 숲]
원래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미륵사가 어떻게 창건됐는지 설명해주는 이야기라 한다.
무왕은 선화공주의 부탁으로 미륵사를 짓게 되고,
그리고 무왕은 익산으로 백제의 수도를 옮기려고도 했다한다.
학자들은 무왕이 익산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된 사람이니,
선화공주는 아마 익산의 어느 유력한 집안의 딸이었을 거라고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어느 틈엔가 신라 공주로 바뀌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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