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 莊陵(장릉)

2015. 12. 10. 06:56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강원도 영월읍 영흥리 산 131-1외 10

사적 제196호

 

 

[안쪽에서 담은 정문 전경]

 

영월은 어딜 가나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이 발길 닿는 곳마다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사약을 받고 승하한 관풍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남겼던 자규루, 마지막 자리인

단종이 묻힌 장릉 그의 능까지 왔다.

 

 

[장릉 안내판 글 내용]

 

[朴忠元旌閭閣(박충원정여각)]

 

영월 장릉 경내 입구에 들어서면

맨 처음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낙촌비각이다.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2년에 세운 것이다.

 

충신 박충원은 중종26년(1531) 文科(문과)에 급제하여 文景公(문경공) 시호를 받았다.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있을 때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있던 端宗(단종)이

꿈에 현몽하여 墓(묘)를 찾아 달라고 하므로 충신 嚴興道(엄흥도)의 후손과 함께

중중36년(1541)에 암장되었던 묘를 찾아 修築(수축)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 비각은 1974년 5월 5일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 구신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암장하였다.

 

 

 

[駱村碑閣(낙촌비각)]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명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郡吏(군리)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 사람에게 끌려가 본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이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보니 꿈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한다.

 

 

[莊陵(장릉)으로 오르는 돌계단]

 

정여각 바로 옆을 보면 언덕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이곳을 올라가면 바로 단종의 릉이 있는 장릉으로 이어진다.

 

 

[계단을 오르다 내려다 보며 담은 駱村碑閣(낙촌비각) 전경]

 

장릉으로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따로 표시가 되어있었다.

급하게 서두르느라 장릉으로 곧장 올랐기에 내려가는 길로 올랐지요.^^

 

 

[장릉 오르는 길]

 

장릉을 오르는 언덕 길 한쪽으로 노송들이 우거져 있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장릉쪽을 향하여 가지를 숙이며 뻗어내리고 있었다.

미물들도 왕을 공경하며, 받들어 모시는 것 같이 보여졌다.

사람으로 어찌 미물보다 못한 일을...했을까....

 

 

[단종의 릉 莊陵(장릉) 전경]

 

영월읍 영흥리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단종릉 조선시대에는

그 어떤 왕릉이라도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백리 안쪽에 자리잡는 것이 통례였었다.

 

 

[당겨서 담아 본 莊陵(장릉) 전경]

 

그러나 장릉은 단종이 유배중에 운명을 마쳤던 곳이므로

그 시대의 완고한 원칙을 벗어나 한양에서도 천리밖이나 떨어진

아주 외진 지방에 봉분했던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릉이다.

 

 

[莊陵(장릉)]

 

단종이 잠들어 있는 莊陵(장릉) 조선의 왕릉에는

릉 앞으로 문관 석상과 무관석상이 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장릉에는 특이하게 문관석이 두 개 있을 뿐, 무관석은 없다.

 

단종 복위와 얽혀 목숨을 잃은 이만 해도 300여 명.

생전에 그 무수한 죽음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단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莊陵(장릉)]

 

또한 장릉은 여느 왕릉과 달리 단종에게 죽음으로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

 

 

[端宗陵(단종릉)에서 내려다 본 莊陵(장릉) 경내 풍경]

 

오른쪽 맨 처음 보이는 건물이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는 곳인 정자각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모양새가 한자의 천간 丁(정)처럼 생겼다 해서

丁子閣(정자각)이라 했다 한다.

 

그 밑으로 곧장 보이는 네모난 것은 영천.

좌측옆으로 보이는 것이 단종비각, 수복실, 배식단사, 배식단이다.

 

 

[配食檀(배식단)]

 

배식단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 여인위,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 년 한식 때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제례를 이곳에서 지낸다.

 

 

 

 

[配食壇詞(배식단사)]

 

[배식단사 안내판 글 내용]


매 년 한식때 단종제향과 함께 여기에 제물을 차려놓고 이들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홍살문]

 

[우측 守僕室(수복실)과 좌측 端宗碑閣(단종비각)]

 

莊陵(장릉) 경내에 있는 守僕室(수복실)과 端宗碑閣(단종비각)이다.
오른쪽 앞에 보이는 건물이 수복실이고 옆에 보이는 작은 건물은 단종비각이다.


그리고 저 뒤 산 능선에 왼쪽으로 보이는 곳이 단종릉이 자리잡고 있다.


영조9년(1733년) 릉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丁子閣(정자각)과 함께 세웠으며,

수복실은 능지기가 저 곳에서 생활하면서 단종릉을 지켰다 한다.

 

 

[정면에서 본 端宗碑閣(단종비각)]

 

1698(숙종 24년) 이 비각을 세우기전까지는 魯山墓(노산묘)라 부르고 있었는데,

비각을 세우면서 魯山墓(노산묘)를 莊陵(장릉)으로 추봉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각 안에는

'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란 글씨가 쓰인 碑(비)가 있다.

 

 

[단종비각 안내판 글 내용]

 

[靈泉(영천)]

 

莊陵(장릉)의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한 靈泉(영천)

숙종 때 단종비각이 세워지고, 일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

정조 1791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 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祭井(제정)으로 장릉의 제사 때만 사용하는 우물이라한다.

이 우물은 평상시에는 물이 많지않다가 한식날 장릉에 제사를

올릴 때면 물이 많이 고이는데 단종의 한이 맺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靈泉(영천) 碑(비)]

 

[丁字閣(정자각) 전경]

 

[정자각 안내판 글 내용]

 

[丁字閣(정자각)]

 

端宗陵(단종릉)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는 丁子閣(정자각)

丁子閣(정자각)이란 건물이 한자의 천간 丁(정)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는 곳으로 丁子閣(정자각)또는 排位廳(배위청)이라 한다.

 

 

[엄흥도 旌閭閣(정려각)]

 

정려각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이로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던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이다.

 

비석은 1833년(순조 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1876년(고종 13년)에 고종이 증시하기를 '충의'라 하여 1879년(고종 16년)
비석에 있는 것을 다시 고쳤다.

 

'旌閭(정여)'는 표창을 뜻하는 말이며,
나라에 충성을 다한 분들을 위해 세우는 것이라 한다.

 

 

[엄홍도 정여각 안내판 글 내용]

 

[엄흥도 旌閭碑(정려비)]

 

정여각은 단종릉 올라가는 입구 재실 옆에 위치하고 있다.
충의공이라 불리는 엄흥도는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운명하자,

세조의 명에 의해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졌기에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영월에서 행정 업무를 보좌하는 호장 엄흥도는 아들 삼형제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야밤을 틈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지금의 장릉)에 몰래

매장하고 가족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다.

 

 

[齊室(제실)]

 

단종릉을 지키는 참봉 한 사람과 수호군졸 아홉 사람이 기거 하였다고 하는 제실이다.

 

매년 단종 제사를 지낼 때 이 곳에서 제사에 쓰일 제물을

준비하고 각종 제기를 비롯한 기구들을 보관해 오던 곳이기도 하다.

 

 

[재실 안내판 글 내용]

 

[齊室(제실) 좌측 내부 모습]

 

[재실 우측 내부 전경]

 

[단종역사관]

 

단종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단종역사관 잊혀지고 왜곡된 단종의 역사를 바로잡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건립된 단종 역사관은 단종의 즉위식에서부터 사약을 받는 모습등

단종의 일대기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연대기식으로 모형전시 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진으로 담지못하게하여 마음으로 담고 아쉬움을 달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