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대왕태실

2015. 10. 20. 06:31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호

 

[태실로 올라가는 입구]

억정사대지국사비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작은 봉우리에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임금의 아들은 보통 사람과는 달리

胎(태)를 좋은 곳에 안장하는데 이러한 시설물을 태실이라 한다.

 

[안내판과 뒤쪽 둔덕위 태실 전경]

 

태봉마을의 서쪽으로 볼록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을 속칭 胎峰(태봉)이라 부르고 있으며

後三峰(후삼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끝에 위치한다.

 

 

[안내판 글 내용]

 

[태실로 가는 나무계단]

 

경종대왕 태실비에 의하면 경종이 숙종 18년(1688)

10월에 태어나자 이듬해 2월에 태장하였으며, 영조 2년(1762) 9월 加封(가봉)하였다.

영조는 선왕 경종의 태실을 꾸미고, 巡護軍(순호군) 16명을 두어 3년마다 慰安祭(위안제)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전국에 있는 태실을 훼손하면서 태 항아리만을 서울 창경궁으로 옮겨 모아 놓았다한다.

 

경종대왕 태실도 이때 훼손돼 사방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76년에 원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이 태실과 같이 원위치에 원형대로 복원. 정비된 것은 드문 것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원자아기씨 태실비]

 

경종은 조선조 제20대 왕이며,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왕자로서
강희 28년(1689) 이곳에 태실을 설치하였다.

 

태실 앞에는 원자아기씨 태실비(1689년)와 경종대왕 태실비(1726년)가 세워져 있다.


 

[경종대왕 태실비와 태실]

 

태실 앞에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景宗大王胎室(경종대왕태실)'이라 쓰여진 태실비가 세워져 있다.

 

 

[경종대왕 태실비]

태실은 조선초기부터 왕자, 공주의 태를 길지에 봉인하는 제도로
태를 봉안하는 장소를 정하기 위해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을 골라 정하게하였다.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이의

출산 후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한다.

 

 

[경종대왕 태실 전경]

 

경종 태실은 둥근 부도형의 태실탑을
중심으로 외곽에 팔각형의 옥개석이 있으며,
보호를 위해 팔각형의 돌난간을 둘렀다.

 

돌난간 내부의 바닥에는 중앙부로부터

밖으로 방사선처럼 넓게 다듬은 16매의 판석을 깔았다.

 

북쪽에 태장시에 세운 태실비가 있고,
동쪽에는 귀부와 쌍룡을 조각한 이수를 갖춘 가봉시에 세운 태실비가 있다.

 

 

[태 항아리]

 

태실은 절구형이고 8각의 옥개석이 위에 올려져 있다.
맨 위에는 보주형을 조각하였는데 이 태실은 8각 원단형의 부도식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의 보관이 그 개인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더욱
소중히 다루었으며, 태실은 주로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내려오며 담은 안산 전경]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인증샷]

 

胎室(태실)이란, 조선시대 왕실 자손의 胎()를 묻고,

복을 기원했던 시설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