隆陵(융릉) 답사

2015. 10. 11. 06:38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사적 제206호

 

[웹에서 모셔온 융건릉 안내도]

 

[융릉 안내판 글 내용]

 

[다리 건너 보이는 정자각 전경]

 

추존왕 莊祖(장조)는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합장 능인 隆陵(융릉)과 그의 효성스러운 아들
22대 왕 정조가 잠들어 있는 健陵(건릉)이 자리 잡고 있다.

 

두 陵(릉을 일컬어 隆健陵(융건릉)이라 부른다.

隆健陵(융건릉) 입구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추존왕 莊祖(장조)의 隆陵(융릉) 부터 들려보기로 하겠습니다.

 

[坤申池(곤신지 : 연못) 전경]

 

풍수 비보 차원에서 만든 융릉의 坤申池(곤신지) 원형 연못은 여의주를 상징한다 합니다.

 

 

[융릉 홍살문과 정자각]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坤申池(곤신지)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한다.

 

 

[정자각]

 

정자각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한자 '丁'
모양으로 되어 있어, 정자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홍살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참도라 하며,
왼쪽으로 가는 조금 높은 길과 오른쪽의 낮은 길이 붙어 있다.

왼쪽 높은 길로는 신이 다니고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을 비롯해서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 하네요.

 

 

[추존왕 莊祖(장조)의 隆陵(융릉) 전경]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莊祖(장조, 1735년~1762년)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獻敬懿皇后(헌경의황후, 1735년~1815년)가 함께 모셔진 릉이다.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영조는 '사도'라는 이름을 내리고 애도 했다고 합니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垂恩墓(수은묘)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莊獻世子(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永祐園(영우원)으로 바꾸었다.

 

1789년에는 永祐園(영우원)을 경기도 화성지역으로 묘를 옮기고

'顯隆園(현릉원)'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顯隆(현릉)의 뜻은

'낳아주고 길러주산 현부에게 융숭하게 보답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정조의 孝心(효심)을 담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을 잘 나타내는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능 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많이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먹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행차를 서둘러 산에 와 보니 송충이의 기승이 말이 아니었다.

 

정조가 진노하여 송충이를 잡아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여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

고 꾸중하자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융릉은 용주사와 함께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유적으로 이 고장 효의 상징이다.

 

 

[ 隆陵(융릉) 뒤에서 바라 본 안산 전경]

 

융건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릉(40기 북한지역 4기 제외) 전체가

2009년 6월 30일 등재된 시점 동시 등재된 것으로 세계 문화 유산으로

인정 받고 있는 조선왕릉 중 하나 입니다.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그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효심 깊은 정조가 안장된 건릉은 다음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