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陵(건릉) 답사

2015. 10. 11. 06:39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1
사적 제206호

 

[웹에서 모셔온 융건릉 안내도]

 

[안내판 글 내용]

 

[홍살문과 정자각 전경]

 

건릉은 제22대 정조(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아들로
8세 때인 영조 35년(1759)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출생과 관련해 남다른 이적이 많다.

 

사도세자는 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이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가 꿈 내용을 그린 그림을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합니다.

 

 

[정자각]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 군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지만

정조는 초창기 불안했던 입지가 강화되어 영조의 후사가 되는 것은 문제없었다.

 

그러나 영조 51년(1775) 노병이 깊어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방해해 조정이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정조에 힘을 모아줄 수 있는 위치였으나,

세손인 정조가 그를 탐포하고 무지하다고 멀리하자 원한을 품고 세손의 적당이 된 것이다.

 

1776년 영조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바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장묘를 영릉으로 격을 높이고 생부의 존호는 장헌세자로,
묘소는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했다.

 

왕통에 관한 정리를 마친 뒤에는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70여 명을 처벌해 분란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했다.

 

정조가 즉위와 동시에 공을 들인 것은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시험을 통해 성과를 확인해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은 것으로 규장각에서 주관했다. 

 

정조는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을 직접 만났다.

100회 이상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건릉 전경]

 

정조의 한은 아버지가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사망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정조는 당쟁에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했다.

 

정조 대의 시기를 조선 시대의 문예 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정조는 조선 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에 달하는 '弘齋全書(홍재전서)'다.

 

일반적으로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 군주로 일컬어진다.

 

정조의 사망에 대해서는 독살되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룬다.

정약용도 그의 저서 '與猶堂全書(여유당전서)'에서 정조의 독살 의혹을 제시했다.

물론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독살의 개연성과 심증이 있다고 적었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사인은 '등창'이다.

이는 등에 난 종기를 말하며 치료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치료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등창의 고름 환부를 직접 짜기만 해도 되는데 굳이

수은 중독의 위험이 있는 연훈방을 처방했다는 점이다.

 

특히 붕어 순간에 사관과 승지가 배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묘 뒤에서 바라 본 안산 전경]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 무덤의 동쪽에 모셔졌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여론 때문에 효의왕후가 죽은 후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합장했다.

 

원래 정조의 묘호는 정종이었는데,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정종 역시 정조라 고쳐 왕실의 묘호를 격상했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김시묵의 딸로 영조 38년(1762)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정조와 가례를 올렸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효의왕후는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소생 없이 69세로 사망했는데, 남편의 묘호에 따라 후에 선황후가 되었다.

 

능호를 정릉이라 했다가 건릉에 합장되면서 능호를 따로 쓰지 않았다.

능호를 健(건)이라 한 것은 쉬지 않고 가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건릉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아버지의 융릉처럼 장대한 모습은 아니다.

융릉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반면 정조의 능은 그의 사후 유신들이 융릉처럼 만드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