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排里 三陵(배리삼릉)

2016. 2. 2. 06:33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3-1
사적 219호

 

 

[배리삼릉 입구에 세워진 상선암가는 이정표]


이곳에서 1.4km를 더 가면 상선암이 있다는

표지판의 유혹을 물리치고, 짜여진 일정에 따라

排里 三陵(배리삼릉)으로 향했다.


간간이 사람들이 산책로를 따라

삼삼오오 걷기 운동을 하며, 솔숲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으로 도시생활에 찌든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배리삼릉 앞 소나무 숲]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붙어 있다.


'신라 제8대 阿達羅王(아달라왕)'.

'신라 제53대 神德王(신덕왕)'.
'신라 제54대 景明王(경명왕)'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안내판과 排里 三陵(배리삼릉) 전경]

 

[안내판 글 내용]

 

[排里 三陵(배리삼릉) 전경]

 

삼릉앞에 있는 香料石(향료석)과 床石(상석)은

제사를 지낼 때 앞에 있는 작은 돌은 향을 피우는 향료석이고
뒤에 넓은 것은 혼이 앉는 자리 즉 魂遊石(혼유석)이라한다.


원래 왕릉의 법식에는 뒷부분인 석물과 같은 형태의

魂遊石(혼유석)이라 불리는 石床(석상)만 있고, 향료석은 없이

묘 앞에 丁字閣(정자각)을 지어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제물을 차려

제사를 모신다고 하는데, 이 삼릉에는 혼유석앞에 향료석이 있어

일반 산소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다.


문화재청의 자료설명에 혼유석이라고 쓰여있으니

그렇게 믿겠지만, 향료석이 혼유석 앞에 놓여 있어 혼유석이

제물 차리는 床石(상석)으로 되어버린 모양같아 보였다.

 

 

[정면에서 담은 排里 三陵(배리삼릉) 전경]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 두 차례나 도굴 당하여, 내부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橫穴式 石室(횡혈식 돌방)으로 밝혀졌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 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좌측에서 담은 排里 三陵(배리삼릉)  전경]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으며, 倭(왜)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5.4m, 지름18m이다.

孝恭王(효공왕)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憲康王(헌강왕)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甄萱(견훤)과 弓芮(궁예)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61m, 높이5.8m, 지름18m이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王建(왕건)과 손잡고 견훤의 大耶城(대야성)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後唐(후당)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4.5m, 지름16m이다.


 

[排里 三陵(배리삼릉)과 상석]

 

배리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도 한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기도 하니, 오랜 세월이 흘러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는
확인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 누가 말해 주겠는가?
무덤역시 저리 서슬 푸르게 누워있으니 누구에게 물어보겠는가?

 

 

[다시 담아 본 排里 三陵(배리삼릉) 전경]

 

왕릉이라고는 하지만, 정자각은

제쳐두고서라도 그 흔한 장명등이나 망주석 하나 없다.


어쩌면 정승이나 대감댁 산소보다 못해 보이기도 하다.
하긴 온통 석상으로 둘러쌓인 릉이나 묘도 보기엔 그리 좋지 않아보였지만,
이렇게 말끔하게 아무것도 없는 삼릉을 보니, 씁쓸한 느낌마저 든다.


배리동에 있으며, 나란히 삼릉이

배치되어 있으니 배리 삼릉이라 이름 붙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