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興德王陵(흥덕왕릉)

2016. 2. 11. 06:44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사적 30호

 

 

[왕릉 가는 길 솔숲]

 

신라 제42대 興德王(흥덕왕, 826~836 재위)의
본명은 金秀宗(김수종), 景徽(경휘)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惠忠太子(혜충태자) 仁謙(인겸)이며,
어머니는 聖穆太后 金氏(성목태후 김씨)이다.


妃(비)는 소성왕의 딸인 章和夫人 金氏(장화부인 김씨)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定穆王后(정목왕후)로 추봉되었다.

 

 

[왕릉가는 길 솔숲 2]

 

즉위 후 당나라 文宗(문종)으로부터 신라왕에 봉해졌으며,
828년 대아찬 金祐徵(김우징)을 시중으로 삼았다.

그해 張保皐(장보고)를 淸海鎭大使(청해진대사)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았다.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金大廉(김대렴)이 茶(차)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안내판 글 내용]

 

[興德王陵(흥덕왕릉) 전경]

 

소나무 숲속을 조금 들어가면 비화산을 祖山(조산)으로
웅장한 王陵(왕릉)이 소나무의 도열을 받으며 1170年을 당당히 버티고 있다.


왕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사랑했던 章和王妃(장화왕비)를 잃어....
슬픔에 젖어있는 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은 새 王妃(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하였지만,  모두 거절하면서....


"새도 짝을 잃으면 슬피 우짖는데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고서
어찌 차마 無情(무정)하게도 다시 아내를 맞이 하겠는가"하였다.


흥덕왕은 앵무새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興德王陵(흥덕왕릉) 전경]

 

이 세상에 사랑만큼 오묘하고 가슴 벅찬 사연들이 있을까?
그 중에서도 흥덕왕과 장화부인김씨의 애달픈 사랑이  아닐까?


삼국유사, 왕력편에 陵(릉)은 안강북쪽 比火山(비화산)에 있으며,
왕비 章花夫人(장화부인)과 함께 매장했다.고 하였다.


왕이 원하면 뭐든 취할 수 있던 시절이 였음에도..
왕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지고지순한 부부애를 보여준 아주 드문 예인것 같다.


興德王(흥덕왕)은 죽으면서 "사랑하는 王妃 곁에 묻어다오"라는
말을 남겼기에 왕비와 함께묻히는 행복을 누렸으니
이보다 더 큰 幸福(행복)이 어디 있으리오.

 

 

[정면에서 담은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

 

王陵(왕릉)의 앞 왼쪽에는 碑石(비석)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채 남아있다.


그 옛날 영화를 못잊어서일까?

아니면 다시 돌아올 비석을 기다리는걸까?
외줄기 대왕의 사랑을 닮아 무구한 세월동안 그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듯하다.

 

 

[뒤에서 담은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

 

[능을 지키는 우측 문인석]

 

[능을 지키는 좌측 문인석]

 

무덤 앞에는 또 하나의 수호신이 있다.
우락부락한 눈을 부릅뜬 무신상이다.
부리부리한 눈과 생김새에서 단박에 서역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와 서역과의 문명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게 하는 단면을 보는 것 같다.

 

 

[興德王陵(흥덕왕릉)에서 담은 앞쪽 전경]

 

대개 신라왕들의 능은 누구의 것이라 알기엔 뚜렷한 묘지석이 없다고 한다.
기록에 의해 어느 곳에 장사지냈다. 라는 것을 보고 추론 할 뿐이다.


1977년 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때 상당수의
碑片(비편)과 함께능의 주변에서 '興德(흥덕)'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興德王(흥덕왕)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해상왕 장보고를 있게 한 군주가 바로 흥덕대왕이다.
발굴된 흥덕대왕의 斷石(단석)에 보면 왕의 풍모가 잘 드러나는 문구가 있다.


神謀決斷(신모결단) 신과같은 지혜와 결단을 가진 사람.
이런 개혁 의지가 있었기에 미천한 백성이었다는 장보고를 발탁을 할 수 있었으리라...


기우는 신라를 어떻하든 바로 세우고자 애쓰신 흥덕대왕.
'청해진대사'란 직함을 부여받은 장보고. 貿易(무역)을 통해
신라 사회를 부강으로 이끌려 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릉을 지키는 우측 석사자상]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王陵(왕릉)을
인도의 타지마할 宮殿(궁전)과  북한의 개성에 있는
노국공주와 합장한 공민왕릉을 이야기 한다.

 

 

[릉을 지키는 좌측 석사자상]

 

그런데도 나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王陵(왕릉)으로
興德王陵(흥덕왕릉)이라 생각하고 싶다.

사랑의 설화를 담고 있는 흥덕왕릉은 수 천 그루의 울창한
소나무들이 한결같이 구불구불, 몸을 비틀고 있다. 

대왕과 장화왕비의 사랑을 바라보기 부끄러워서 일까??
아니면 그들의 짙은 사랑이 간지러워서일까?
꼬이듯 서로 엉켜 자라는 나무도 있었다.

 

 

[興德王陵(흥덕왕릉)]

 

봉분 바로 앞의 상석은, 새 것으로 바꾼지 몇 년 안되었다고 한다.
바꾸기 전 옛 상석은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설화에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형체가 달라질 정도로 닳았다고 한다.
그러나 닳았을 망정 그대로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새로운 상석이지만, 옛 상석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소중하게 아껴주었으면...
흥덕왕의 지극한 사랑을 닮고자 하는 마음으로 새 상석에도 왕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 것 같아서 살며시 만져 보았다.


新羅(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 왕릉으로 封墳(봉분)의 규모가 비교적 크다.

 

 

[십이지상 조각]

 

왕의 나이 오십 줄에 등극을 하여서 11년의 짧은 재위 기간 때문에
해상 부국으로 번영을 구가할 신라의 운명도 왕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갔다.
장보고도 그 후, 암살당하고 말았다.


王陵(왕릉)주위에는 41개의 돌난간이 아름답게 둘려있으며,
護石(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겨 王(왕)을 호위하고
주위의 사악한 잡귀를 근접하지 못하게 지키고 있다.

 

 

[능옆을 지키는 석사자상]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있는 사자도

대왕의 사랑을 방해 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능 옆을 지키는 석사자상]

 

누군가 혹 방해하는 사람이던 짐승이던

나타나기만 하면 금방 달려들것 같은 모습의 석사자의 모습

 

 

[다시 담아 본 興德王陵(흥덕왕릉) 전경]

 

경주시내 안에 있었다면 오가며 드나드는 관광객으로
발걸음 소리도 소란했을탠데... 슬픈 사랑의 솔바람만 불어오는듯하지만,
어쩌면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에서 살아생전 못다한 정을 나누며 계신지나 아닌지... 

 

 

[릉을 나서며 담아 본 입구쪽 넓은 들판전경]

 

1170년 전의 두 戀人(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주는 솔바람 香氣(향기)를 가슴가득 담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