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12. 06:14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1번지
[바우덕이 묘와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에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한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이곳 안성 청용리 불당골 마지막 산동내 개울 건너
가파른 산허리엔 유명한 사당패 바우덕이라는 23세의
꽂다운 女人이 묻힌 墓가 있는 곳이다.
생전의 바우덕이가 줄타기를 하듯 바우덕이의 묘로 오르는 돌계단도 가파르다.
[碑(비) 옆면에 새겨진 글]
바우덕이는 1848년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하여 1853년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 남사당 에
당시 5세로 입당하여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을 학습하였다.
바우덕이의 본명은 '金岩德(김암덕)'이다.
1863년에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으로
바우덕이가 안성 남사당 꼭두쇠로 당시 15세에 추대되어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바우덕이 묘]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집단인 안성남사당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令旗(영기)'에 걸어준 옥관자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 벼슬을 받은 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旗拜(기배)를 드렸다고 한다.
旗拜(기배 : 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
[묘 뒤에서 본 안산]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한다.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후기의 여자라는 것과
노비보다 못한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예인 집단으로 인정을 받아 백성들에게
살아갈 꿈과 희망을 준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바우덕이 묘 전경]
1865년~1870년까지 안성 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되어 全國(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70년 폐병으로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하니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냈다.
안성 청용리 불당골은 조선초기부터 사당패의 본거지로 유명하였다.
안성 남사당풍물이 유명해지면서 이런 영광의 근원이
바우덕이에 있는지라 안성유지들이 나서서 버려진 바우덕이
墓(묘)를 찾아내어 허물어 내린 봉분은 흙을 더 쌓아주었고 없었던
무덤 날개도 마련해 주고 제를 올릴 수 있도록 제단석도 갖추었다.
최초의 여자 꼭두쇠인 바우덕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매년 가을이 되면 경기도 안성에서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가 열린다.
'남사당' 1900년대초 서민 사회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중예인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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