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烈公(충렬공) 金方慶(김방경) 장군 묘

2016. 3. 3. 06:01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35

 

[재실]

재실의 문이 닫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하였다.

 

[담너머로 담은 재실]

아쉬워 담 너머로 깨끔발을 하고 담아 보았습니다.

 

[김방경 영정 웹에서 모셔옴]

그림은 김송배 화백이 그린 영정이라 합니다.

 

[묘역으로 오르는 돌계단]

[참판공 묘소 표석비]

[묘역으로 오르는 돌계단 2]

[묘역 전경]


金方慶(김방경, 1212-1300) 본관 安東(안동). 자 本然(본연).
신라 敬順王(경순왕)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敏成(민성)
아버지는 兵部尙書(병부상서). 翰林學士(한림학사)를 지낸 孝印(효인)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민성이 양육했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김방경 묘와 묘비]


고려 원종 11년(1270) 三別抄亂(삼별초난)을 토벌하고,
원종 15년(1274년)과 충렬왕 7년(1281)에 麗蒙聯合軍(려몽연합군)의
고려국 총사령관으로 일본정벌에 참가하여 분전하였던
上洛君 開國公(상락군 개국공)이다.


김방경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충렬왕과
함께 君臣間(군신간) 같은 시호인 忠烈(충렬)이다.

 

[묘비]


올곧은 성품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여러 차례 무고를 당해 옥에 갇혔다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제1차 일본정벌 직후에는 매국노 홍다구와
부원배들의 무고로 한겨울에 벌거벗긴 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김방경은
"내가 나라를 위해 간과 골이 땅바닥에 굴러다닐지언정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부족하거늘 어찌 내 한 몸을 아껴서
거짓 자백으로 나라를 저버리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참군인의 정신과 기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방경은 제2차 일본정벌 후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 직후 상락군개국공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에
봉해졌고, 타계 후 충선왕은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

 

[묘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장군은 고난의 시대에 살면서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 항쟁과 굴욕을 함께 맛본 역사의 증인이다.

 

[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2]


그는 처절한 대몽 항쟁을 겪으면서 우리 겨레가
쓰러지는 참담함을 보았고, 끈질긴 항쟁도 끝내 좌절되자
타협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대가 인물을 삼키기도 한다. 그는 어느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