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 시조 태사공 조계룡의 묘소와 種德齋(종덕재)

2016. 3. 16. 06:21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1115-2

 

[종덕재 정당 솟을 삼문 전경]

 

창녕조씨 시조인 太師公(태사공) 曺繼龍(조계룡)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영조 33년(1757)에 세운 재실이다.

 

[안내판과 종덕재 정당 솟을삼문]

[안내판 글 내용]

[종덕재]

 

순조 17년(1817)에 묘단비를 세우고

순조 32년(1832)에 묘각을 중건하여 種德齋(종덕재)라 명명하였다.

 

1929년 창녕조씨 대종회에서 중수하였고

6.25전쟁 때 일부 파손되었으나 다시 중수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 창녕조씨 문중에서 묘제를 거행하고 있다.

 

[종덕재 2]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서재를 두고

정면에 솟을대문인 영은문을 배치하였으며

정당 옆에 3동의 부속사를 두어 二口자의 배치 구조이다.

 

정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집으로서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방 2칸을 달았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삼문 옆 묘소 가는 길]

[묘소로 오르는 길]

[계단 아래쪽에서 담은 묘소 전경]

 

昌寧曺氏(창녕조씨) 시조 太師公(태사공)

曺繼龍(조계룡)이 묻힌 곳으로,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초제마을에 있다.

 

동서로 2기의 무덤이 있는데, 서쪽 묘는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동쪽 묘는 저경 13.9m, 높이 5m이고, 서쪽 묘는 저경 11.2m, 높이 3m이다.

 

장축은 남-북 방향이며 형태는 원형이다.

묘비는 1757년(영조 33)에 세웠으며, 豊山(풍산) 洪良浩(홍량호)가 비문을 썼다.

 

묘소 앞쪽에 1757년에 지은 재실 種德齋(종덕재)가 있다.

 

[묘소 전경]

 

昌寧曺氏(창녕조씨)의 시조 曺繼龍(조계룡)은

신라시대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전해오고 있다.

 

'朝鮮氏族統譜(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翰林學士(한림학사) 李光玉(이광옥)의 딸 禮香(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창령조씨 시조 曺繼龍(조계룡) 묘]

 

예향은 창녕현 鼓巖村(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우연히 병이 생겨 火旺山(화왕산) 龍池(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玉玦(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 후 아들을 낳으니 겨드랑이 밑에 '曺(조)'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묘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이것을 본 이학사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신기하게 여겨

성을 曺(조)로 하고 이름을 繼龍(계룡)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고,

輔國大將軍上柱國大都督太子太師(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독태자태사)

에 올랐으며, 昌城府院君(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 없다.

 

[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신라 말에 阿干侍中(아간시중)을 지내고

고려 태조의 딸과 결혼한 曺謙(조겸)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후손들이 조계룡을 시조로, 조겸을 중시조로 삼고

창녕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묘소 주변 솔숲]

[돌아오며 다시 담아 본 종덕재 정당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