藥峯(약봉) 金克一(김극일) 묘

2016. 6. 14. 06:24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산161-1

 

[사빈서원에서 담은 묘소 전경]

[도로에서 담은 묘소 전경]

사빈서원을 둘러 본 후 저 멀리 선명하게 보이는 묘소를
찾아 출발하였지만, 어디로 해서 가는지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내려갔다 올랐다는 반복.

 

[도로에서 줌으로 당겨 담은 묘소 전경]

[도로에서 줌으로 당겨 담은 묘소 전경 2]

결국 입구를 못 찾아 돌아와야 하는가 하고
도로에서 줌으로 당겨 묘소를 담아 되돌아 오려다
드디어 입구를 찾았다.

 

[도로변 표시석]

약봉 김선생 묘소 입구 표시석이
어찌나 반가운지 그리운 임을 만난듯 가슴이 두근두근..^^

 

[표시석 옆으로 난 묘소 가는 길]

무조건 올랐지요.
묘소를 향해~

 

[묘소 아래쪽에서 담은 전경]

金克一(김극일, 1522~1585)
자 伯純(백순), 호 藥峯(약봉), 본관 安東(안동)
父(부) 靑溪(청계) 金璡(김진), 母(모) 驪興閔氏(여흥민씨)
李滉(이황)의 문인이다.

 

[묘 아래쪽에서 담은 전경]

金璡(김진)의 다섯 아들 중 장자로 동생 金守一(김수일),
金明一(김명일), 金誠一(김성일), 金復一(김복일)과 함께
'金氏五龍(김씨오룡)'으로 불렸다.

 

[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가학으로 글공부를 하다가 20세 무렵 아우 김명일,
김성일과 함께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뛰어난 재질과 함께 풍채와 언변을 두루 갖추었으며
학문에 대한 열성이 돋보여 일찍부터 주위의 주목을 받았다.

 

[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사마시를 거쳐 27세 때인 명종 1년(1546)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사헌부 감찰, 형조정랑,
예조정랑, 성균관사성 등 내직과 홍원현감, 淸洪道都事(청홍도도사),
경상도도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좌측에서 담은 묘소]

성주목사 시절 '啓蒙翼傳(계몽익전)'
간행해 스승 李滉(이황)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우측에서 담은 묘소]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蒼古(창고)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시는 매우 정교했고 사실을 인용함에 비유함이 간절하였다.


[구 묘비]

[비문]

[신 묘비]

[묘소에서 담은 사빈서원 전경]

 

혹 사빈서원을 둘러보시지 않으셨다면 요기 클릭 하시면 됩니다.

 

[묘뒤에서 담은 안산 안산]

선조 13년(1580)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룬 후
정3품 內資寺正(내자시정)으로 복귀하고 사헌부장령을
잠깐 지냈으나 당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1583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저서로는 '藥峰逸稿(약봉일고)' 가 있다.


묘소 아래 도로와 사빈서원 전경]

숙종 11년(1685) 김진과 다섯 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泗濱書院(사빈서원)이 세워지면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