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문신 남휘주, 남민생 부자 묘

2016. 6. 21. 06:15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재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재사쪽에서 담은 設壇(설단) 전경]

보통 재사의 누마루는 산소를 바라보는 법인데,
南興齋舍(남흥재사)는 '設壇(설단)'쪽을 바라보고 있다.

남흥재사를 둘러보지 못하여 궁금하시다면
요기 클릭하셔서 들려보셔요.

 

[유허비와 설단기념비 전경]

'壇(단)'은 묘를 확인하기 어렵고 실전되어
찾을 수 없을 때 조상을 모시는 '設壇(설단)'이다.

여러 분의 조상을 合祀(합사)하여 제사를 모실 경우도 '壇(단)'을 차려 놓는다.
이럴 때는 神主(신주)를 모실 수가 없다 한다.


[설단기념비 글 내용]

[유허비 전경]

[묘소로 가는 길]

설단옆 도로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그곳을 조금 더 오르면 묘소로 가는 길이 있지만,
무성한 풀들이 우거져 자칫하면 스쳐 지나치기 쉽다.

 

[묘소 가는 길 2]

완만한 숲길을 한참을 오르다 보면,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보인다.
이젠 어느길로 가야할까?

 

[묘소가 보이는 입구 전경]

다행히 좌측으로 보이는 길 입구에서 멀리 묘소가 보였다.

 

[南暉珠(남휘주). 南敏生(남민생) 부자 묘소 전경]

묘소는 재사 맞은편에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에 향사와 시제를 치른다 한다.


[앞쪽 南敏生(남민생) 묘 전경]

南敏生(남민생, 1348~1407) 본관 英陽(영양) 자 追遠(추원)
判書(판서) 暉珠(휘주)의 子(자)이다.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벼슬이 衛尉少尹(위위소윤)에 이르렀다.


[南敏生(남민생) 묘]

재임시 李太祖(태종조)가 등극하니 恭讓王(공민왕)이
原州(원주)로 은둔함으로 前朝(전조)의 節義(절의)를 지키기 위해
鄕里(향리)로 돌아와 종적을 감추었다.

太宗(태종)이 즉위하여 平海郡事(평해군사)에 제수하니 부득이 취임하였다.
태종 6년(1406) 工曹參議(공조참의)가 되었으며, 뒤에
戶曺參判(호조참판)에 贈職(증직)되었다.

 

[묘비]

[묘비 뒷면]

남민생은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다 한다.

 

[뒤쪽 아버지 南暉珠(남휘주) 묘 전경]

南暉珠(남휘주, 1326~1372) 남민생의 夫(부)
본관 英陽(영양) 자 岸明(안명)
恭愍王(공민왕) 3년(1354) 문과 급제.


[南暉珠(남휘주) 묘]

奇轍(기철). 權謙(권겸) 등 權奸(권간)을 討伐(토벌)한
功(공)으로 中郞將(중랑장)이 되고 뒤에 典理判書(전이판서)에 이르렀다.

 

[묘비]

[묘비 뒷면]

[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정부인 의령여씨 묘 전경]

남휘주의 묘 뒤쪽에는 정부인 의령여씨 묘가 자리하고 있다.


[정부인 의령여씨 묘]

[남휘주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영양남씨 시조 南敏(남민)은 본시 중국 당나라 사람
金忠(김충)으로 경덕왕 14년(755) 봉명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영해 축산항 부근에 표착하여 신라에 귀화하였다.

 

[내려오며 담아 본 야생화]

경덕왕이 南氏(남씨)로 성을 내리고 이름을 敏(민)으로 고쳐
영양현을 식읍으로 내려 살게 하고 英毅公(영의공)이라는 작호를 내렸다고 한다.
후손들이 宜寧南氏(의령남씨), 固城南氏(고성남씨)로 분파되었다.

 

[야생화 2]

14세기 중엽 안동에 정착한 南輝珠(남휘주)를
입향조로 하여 와룡면. 일직면. 풍산읍 일대에 세거하였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