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峯(학봉) 金誠一(김성일) 神道碑(신도비)와 墓傍石(묘방석)

2016. 6. 28. 06:26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산75-3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학봉 김성일 신도비각 전경]

神道碑(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이며, 墓傍石(묘방석)은 墓(묘)의
바로 옆에 두어 墓(묘)의 주인공을 밝혀두는 것이다.

이 비는 조선시대 중기 柳成龍(유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파를
대표하였던 학봉 김성일 선생의 묘에서 약 50m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이들 금석자료의 가치와 그 역사적 의미는 더욱 커진다.

신도비는 건립된 시기로 보면 경상북도 내에서
다른 비석에 비해 오래되었고, 규모가 거대하다.

 

[신도비 머릿돌]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신과 이수를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세워놓았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를 새겨놓았다.

 

[신도비문]

인조 12년(1634)에 세웠으며, 鄭經世(정경세)가
비문을 짓고, 李山海(이산해)가 글씨를 썼다.
앞면에 새겨진 비의 篆額(전액)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神道碑銘(신도비명)은
'贈吏曹參判鶴峰金先生神道碑銘(증이조참판학봉김선생신도비명)'
이라 되어 있으며, 비신 규격은 높이 213㎝, 너비 108㎝, 두께 37㎝이다.

 

[안내판과 유형문화재 표석비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안내판 일본어 글 내용]

[안내판 중국어 글 내용]

[묘역 전경]

신도비에서 우측으로 난 가파른 길을 오르면
윗쪽으로 선생의 묘역이 보이며, 아랫쪽에도 묘가 있다.

 

[아랫쪽 묘에서 담은 선생의 묘소 전경]

[아랫쪽 묘비]

묘비에는 順興 安氏(순흥안씨) 지묘라 새겨져 있다.

 

[아랫쪽에서 담은 학봉 김성일 묘 전경]

金誠一(김성일) 본관 義城(의성),
호 鶴峰(학봉), 자 士純(사순)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을 때
전란의 징조를 부정하고 영남 일대의 성곽 수축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왜군이 침략해 오자 선조는
그를 벌하려 했지만 영남 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하다는
도체찰사 유성룡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를 경상도 招諭使(초유사)로 임명했다.

 

[우측 묘방석과 망두석 문인석 전경]

묘방석은 다른 묘소에서 보기 힘든 예로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종중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墓傍石(묘방석)]

묘방석은 광해군 11년(1619) 건립되었는데,
碑(비)보다 앞서 墓(묘)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有明朝鮮鶴峰金先生士純之墓(유명조선학봉김선생사순지묘)'라 새겨져 있다.

규격은 높이 155㎝, 너비 175㎝, 폭 130㎝, 둘레 500㎝로 되어 있다.

 

[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전경]

[묘비]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여섯 살 때부터 '孝經(효경)'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뜻을 세우고 학문에 몰입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어린 나이에도 고집이 세고 자기 의견이
분명했으므로 훗날 세태를 좇는 인물이 되지 않겠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9세 때 어머님을 여의고 10세 때에
아버지 청계공(靑溪公)께서 學堂(학당)에 보냈다.
선생은 유년시절에 지혜가 출중하고 뛰어난 두뇌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지금도 안동지방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김성일은 출사 초기 예문관에서 복무할 때
노산군 복위와 사육신의 복작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조야를 술렁이게 했다.
세조를 중흥조로 인정하고 있던 당시 분위기에서 실로 대단한 강단이었다.


[묘 뒤에서 담은 묘소와 묘방석]

김성일이 활동하던 조선 중엽은 양전 사업을 통한 농지 확장,
시장의 발달 등 괄목할만한 사회변화가 있었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조세와 공역 등을 통한 각종 수탈에 시달리며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빈부의 양극화로 인해 조정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상투 틀자 종군하여 수자리에 몇 번 갔나.
평생토록 갖은 고생 가련코도 가련하다.
백발 되어도 병적에는 이름 올라 있으니,
죽어 구천 가야지만 어깨 펼 수 있으리라.

김성일이 황해도 순무어사로서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에 쓴 시다.
'海西錄(해서록)'에 수록되어 있는데,
죽어서야 가혹한 군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민간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묘방석 뒤면]

묘방석 전체 돌아가면서 글씨를 다 새겨 놓았다.


[아랫쪽 묘의 묘비와 석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며 다시 담아 본 묘소 전경]

[내려오며 담은 신도비각 전경]

비록 잘못 판단은 하였으나, 왜군이 침략해오자,
심기일전한 김성일은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며 적극적으로
민심을 규합하고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왜군의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조선의 멸망을 막아낸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 사가들은 김성일을 일컬어
그 공이 허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