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瑩 將軍 墓(최영 장군 묘)

2016. 1. 16. 06:23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崔瑩將軍 墓(최영장군 묘)로 가는 길]


高麗(고려) 末期(말기)의 名將(명장)이며 충신인

崔瑩(최영, 1316∼1388) 本貫(본관) 昌原(창원) 諡號(시호) 武愍(무민).

장군은 忠肅王(충숙왕 3년, 1316) 사헌규정 元直(원직)의 아들로
동주(鐵原, 철원)에서 태어나 護軍(호군), 大護軍(대호군)을 거쳐 찬성사,
팔도도통사, 門下侍中(문하시중)등을 역임하였다.


鴻山大捷(홍산대첩)에서 왜구를 섬멸한 것을 비롯하여

수십차에 걸쳐 왜구를 무찌르고 국내의 대소 반란 토벌 등

80여 회나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恭愍王(공민왕 4년, 1355)에는 元(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八站(8참)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횡포와 국내의 혼란으로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았고, 신흥 明(명)나라가 鐵嶺(철령)

이북 지방에 鐵嶺衛(철령위)를 설치하여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가
李成桂(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하였다.


禑王(우왕 14년, 1388) 이성계등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어 선친의 묘소 앞 이곳에 안장되었다.


자신의 첩 딸이 우왕에게 시집가 寧妃(영비)가 되었고

부원군자리에 오르면서 모든 권력이 그의 수중에 있을 때였으며,
고려 말 우왕 당시 문하시중과 팔도도통사로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골라 쓴 좋은 자리라 한다.

 

 

[崔瑩將軍 墓(최영장군 묘)로 오르는 돌계단]


홍건적이 쳐들어와 1359년 서경이 함락되자 이를 쳐 수복하였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역시 이를 격퇴하여 수도를 수복하였다.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한 崔瑩(최영)의 묘이다.
최영은 동주 최씨로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 회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명장으로
특히 공민왕 5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지역을 공격하여 되찾았다.


또한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팔도도통사로서 전쟁을 지휘하였으나
출병한 이성계의 위하도회군을 막지 못하고 이성계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1389년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으로 섬기기도 한다.

 

 

[崔瑩將軍 墓(최영장군 묘)]


부인 문화유씨와 합장하여 1기의 묘로 만들었다.
2단 호석을 두른 사각형 묘로서 曲墻(곡장)을 설치하였다.

묘 앞에는 좌우에 묘비와 충혼비가 있으며 상석, 혼유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과 문석인각 한 쌍이 좌우에 배열되어 있다.

그의 묘는 구파발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대자리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산 기슭으로 다시 3~400m 올라가면
대자산 중턱에 최영장군의 묘가 있다.

 

이북에도 그의 묘소가 있는데 開豊郡(개풍군) 德物山(덕물산)
최영장군이 묻혀 있는 赤墳(적분)이 있으며 적분 위에는 將軍堂(장군당)이
있어 최영장군을 모셔놓고 있다한다.

14세기후반 고려말, 압록강 건너 遼東(요동)지역을

우리땅에 편입시키려 대망을 꿈꾸던 우국 노장 최영 장군.
뜻하지 않게 이성계의 정권찬탈의 희생양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1388)


최영장군이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읊은 詩 올려봅니다.

 

북소리 두리둥둥 내목숨 앗아간다.
충신의 죽는길이 이다지도 어려우냐?
천하를 호령하던 초패왕의 기개세가
黃口幼兒(황구유아)한테 꺾일줄을 어찌알리.

 

 

[崔瑩將軍(최영장군) 아버지 墓(묘) 전경]


"汝見金如石(여견금여석)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혹간엔 장군의 말씀인 줄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지만,
장군의 부친의 말씀이라 합니다.


見金如石(견금여석) 항상 이 네 글자를

띠에 써 가지고 일생동안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崔瑩將軍(최영장군) 아버지 墓(묘)]

 

비록 나라의 정권을 한 손에 잡고 위엄이 중외에

떨칠 때에도 털끝만큼이라도 남의 것을 취한 일이 없었다고한다.


부친으로부터 遺訓(유훈)을 받은 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던 최영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고, 공민왕 원년(1352)에 趙日新(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여 武名(무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최영장군은 살아생전 명장으로서 그가 지닌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되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름 석자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다.


고려 왕조를 수호할려다 결국 이성계에 죽음을 당하자.
그의 죽음을 접한 많은 백성들이 나라 곳곳에서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한다.

이성계는 비록 최영장군과 정적관계에서 죽였지만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새 왕조를 세운 후 '武愍(무민)'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장군의 넋을 위로하였다.

 

 

[崔瑩將軍 墓(최영장군 묘)]

 

요동 정벌을 찬성하는 최영 측과 이를 반대하는
이성계 장군 측의 주장이 갈라져 고려는 힘을 모으지 못하였다.

 

결국 우왕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여 요동 정벌을 결정하여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병사들을 독려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게 하지만,
가는 도중에 위화도에서 장마로, 전염병이 돌아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개경으로 사람을 보내 원정의

어려움을 몇 가지 들어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뜻을

우왕에게 전하고, 최영 장군에게

"좌군 도통사 이번 원정은 전혀 승산 없는 싸움이오.
병사들을 무참하게 죽게 할 수는 없소.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갑시다."
하고 청하였지만, 최영장군과 우왕은 요동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이성계와 조민수 장군이 이끄는 5만의 군사는 마침내

그 해 6월 3일 개경으로 쳐들어와 우왕을 폐위하고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고 최영 장군은 옥에 가두었다가

"죄인 최영은 듣거라!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부정한 짓으로
재물을 모았으므로 귀양을 보낼 것이다."

이성계의 무리들은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최영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부정한 재물을 모았다는 누명을 씌워 유배를 보냈다.

 

최영은 귀양지인 고양에서 충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개경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결국 그해 12월 순군옥에서 죽임을 당한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최영 장군은 돌아가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한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에 단 한 번이라도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면
내 무덤에서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결코 풀이 돋지 않을 것이다."


이 절규를 입증이라도 하듯,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의 묘소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풀한포기 살지않는 '붉은무덤 : 赤墳(적분)'이였다한다.

 

"최씨 앉았던 자리엔 풀도 안 난다."는 속설을 낳기도 했다


후손들이 아무리 잔디와 흙을 교체하고

비료를 주며 가꾸어도 잔디가 살지 못하였다한다.


그러더니 1990년무렵부터 드디어 잔디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여 군데군데 조금씩 자란다 하나 풍성하게 보기 좋지는 않다.


장군께서 처형당하신지 꼭 600년이 지난 이제서야
이성계에 대한 원한을 푸신 모양"이라 후손들이 전한다 한다.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장군의 원혼이
다 풀려 파란 잔디가 보기 좋게 자랄까


장군의 심사를 헤아려보며 잠시 묵념을 드리고 돌아섰다.

 


[崔瑩將軍(최영장군) 묘앞 문인석]


집의 형세는 겨우 먹고 살기에 족할 정도였다.
그때 宰樞(재추)들이 서로 초청하여다가 장기, 바둑으로 날을 보내며
다투어 맛좋은 음식을 마련하여 호화롭고 사치한 것에 힘썼으나
공만은 홀로 손을 맞이하면 낮이 지나도록 음식을 내오지 않다가
해가 저물어서 기장과 쌀을 섞어서 밥을 짓고 잡채를 곁들여 내오니
여러 손들이 배가 고파서 나물밥을 다 먹고 말하기를

"철성댁 밥은 매우 맛이 있다."고 하면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병법이지요."라고 하였다.


가난해서 손님들이 오면 일부러 배고프기를

기다렸다가 음식을 내어주곤 하였다 한다.


태조가 시중으로 있을 때에 일찍이 한 聯句(연귀)를 지어 말하기를

제목없음
"석 자 칼머리에 社稷(사직)이 편안하다"라고 하니


한때의 문사들이 다 대를 맞추지 못하였다.
공이 곧 말하기를


"한가지 채칙끝에 건곤이 정 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다 탄복했다.


전시 분망한 가운데도 이따금 시를 읊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어느 날 저녁에 여러 재상과 聯句(연귀)를 지었는데

慶復興(경부흥)이 부르기를

 

天是古天人不古(천시고천시부고)

하늘은 옛 하늘이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하니 최영이 對句(대귀)를 놓아 말하기를   


月爲明月相無明(월위명월상무명)
달은 명월이로되 재상들은 밝지 못하구나. 이라고 하였다.

 

 

[묘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서울시립 장재장(벽제화장터)을 지나 통일로에 들어선 후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대자산 자락이 앞을 막아선다.


모든 차량은 이곳에서 멈춰설 수 밖에 없다.
주차장이 마땅히 없어...우선 주차할 곳을 찾아 세워두고
下馬碑(하마비) 보통 궁궐이나 종묘 앞에 서 있는 하마비는
이곳엔 없었지만, 대자산 자체가 하마비였다.


차량을 이용하였드라도 이곳에서는 내려서 걸어갈 수 밖에 없다.
걸어서..0.5km 를 걸어야 한다고 적혀있었지만, 가도 가도 산길 첩첩이 산중이다.

저녁무렵이라 서둘려야 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둘러보고 돌아와야하기에...
길을 잘못 들었는가 하고 생각되어질 쯤해서...조금 더 가니
양지 바른 아늑한 곳에 돌계단과 함께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서
반가움에 걸음을 재촉하였다.

여간한 마음을 먹지 않고는 찾아가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