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3. 06:38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1
시도기념물 34호
[주차장에서 본 사당과 묘역 전경]
조선 시대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는
尨村 黃喜(방촌 황희, 1363~1452)선생의 묘이다.
황희는 長水(장수) 황씨로 개성에서 태어나 138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조정의 요청으로 관직에 나오게 되었으며,
세종 13년 의정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부사에 올라 국가대사를 돌보았다.
[사당 삼문 전경]
세종 31년 86세로 은퇴한 후에도 세종이 국가의 중대사를 자문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농사개량에 힘써 '經濟六典(경제육전)'을 펴냈다.
4군 6진의 개척과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여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遠慕齋(원모재) 와 신도비각 전경]
고려 공민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遠慕齋(원모재)]
태종 대의 관직생활을 통해 얻은 국정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세종 대에는 20여 년간 나라살림을 총괄하던 의정부에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世宗盛世(세종성세)에 크게 공헌하였다.
[신도비각과 안내판 전경]
[尨村黃先生神道碑閣(방촌황선생신도비각) 현판]
[尨村黃先生神道碑閣(방촌황선생신도비각)]
묘역 아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사적비와 194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었다.
원래의 신도비는 연산군 11년(1505년) 신숙주가 짓고
안침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전해진다.
神道碑(신도비)란
왕이나 고관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舊(구) 神道碑(신도비)]
오랜 세월이 흘러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여서,
1945에 신도비를 처음의 신도비 옆에 다시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新(신) 神道碑(신도비)]
[遠慕齋(원모재) 옆으로 난 돌계단 위 사당 삼문 전경]
파주, 탄현, 금촌. 황 정승의 묘는 산이라 부르기보다는
아담한 작은 언덕같아보이는 곳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경기 일원에는 조선조의 정승, 판서의 묘가 산재해 있다.
황희정승은 오늘날까지도 청념의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맹사성과 함께 청백리의 대표주자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60여년의 관직 생활중 두 번이나 좌천되고, 세 번의 파직, 서인으로
강등되기를 한번, 귀양살이 4년, 등 우여곡절의 벼슬생활이 연속 되었다.
그러나 그는 종도 다같은 임금의 백성이라며
모든백성에게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허락했던 진정한 인간주의자 였다.
[尨村黃先生不祧廟(방촌황선생부조묘) 현판]
不祧廟(부조묘) :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不遷之位(불천지위)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尨村黃先生不祧廟(방촌황선생부조묘) 삼문 전경]
묘가 이곳에 있게된 연유는 고향인 개성과 벼슬지인 한양의 정가운데
지점이어서 양쪽을 언제나 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18년간 영의정을 지냈으며 명재상이라 알려졌으나,
재물을 멀리한 청백리로도 이름을 길게 남기고 있다.
세종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기셨기셨던 맹사성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황희가 88세까지 영의정을 하였기에 끝내 좌의정에서 영의정을 못해보시고
돌아가신 맹사성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한다는 옛말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尨村黃先生不祧廟(방촌황선생부조묘) 전경]
조선조 초기에 고려조 권신들간의 권력쟁탈의 도구였던
사병제도를 혁파하여 왕권이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종은
많은 공신, 외척들 마저 숙청하여 문신들의 시대,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
황희 정승의 아들도 영의정에 올랐다.
아들교육에 관한 일화 역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의 묘소 건너 편에 서로 마주보는 자리에 아들의 묘소가 있다고한다.
부친의 덕으로 벼슬을 하는 음직제도에 의해 관계에 진출하였고
자신은 물론 가문의 전부를 건 한판 도박, 세조를 도운 공으로 정승이 되었다.
역사에 이 분들에 대한 뒷말이 없는 것을 보면
나라의 기둥이었으며 장수 황씨 가문의 영광임이 틀림없는듯 하다.
황희선생의 호가 방촌인데, 尨(방)의 뜻이 삽살개 방이다.
즉 두문동에서 자기 혼자만 나오면서 자기더러 개새끼라 부르라는 뜻이라한다.
묘로 오르는 길은 후손이 사는 집의 담 옆으로
난 돌로 된 계단을 올라 사당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된다.
[안내판 글 내용]
[黃喜先生 墓(황희선생 묘)]
황 정승의 묘는 특이한 점이 있다.
둥근 봉분이 아닌 장방형이며 묘앞부분에 긴 돌난간을 쌓아올리고
좌우로 역시 돌난간이 묘로부터 앞으로 내어 쌓은 특이한 모양이다.
묘역 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으며 봉분 의 규모 역시 크다.
봉분의 아랫부분은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床石(상석)과 향로석 등의 석물 이 있다.
[墓碑(묘비)]
묘비는 오래되어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지만
글자는 또렷이 알아 볼 수 있다.
'領議政翼城公 村黃喜之墓. 繼配貞敬夫人 淸州楊氏
(영의정익성공 촌황희지묘. 계배정경부인 청주양씨)'이라 새겨져 있다.
[우측에서 담은 黃喜先生 墓(황희선생 묘)]
근래에 설치하여 이끼 하나 없는 상석은 큼직한데,
원래의 상석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조그만 것이
묘 왼쪽 한곳에 놓여있다.
[문인석]
상석 앞에는 장명등이 서 있고,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한쌍씩 있었다.
무인석과 문인석, 장명등은 세월의 이끼를 덮고 쓴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묘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능묘의 봉분 주위를 둘러 쌓은 돌을
護石(호석)이라 하는데, 이 묘는 호석을 앞쪽에만 쓴 것이 특이하다.
[선생의 묘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들 묘]
전하는 말에는 조선시대의 정승은 넷 밖에 없다 한다.
이 말은 이 분들의 이름 아래에는 대체로 '정승'이란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황희 정승을 비롯하여
'맹정승 孟思誠(맹사성, 1359∼1438),
상정승 尙震(상진, 1493∼1564)
梧里(오리) 정승 李元翼(이원익, 1547∼1634)'을 가리킨다.
특히 방촌은 향년 89세에 별세한 장수한 정승으로,
뛰어난 학문과 治政(치정)보다는 그 휼륭한 仁德(인덕)으로 인한
처세와 삶의 지혜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사당 아래 핀 들꽃]
淸白吏(청백리)란?
관직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뽑아 관직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총 219명이 배출 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황희, 맹사성, 이원익, 이현보, 이황, 김장생, 이항복등이 있다.
[사당 아래 핀 들꽃 2]
황희정승이 임종하는 날 시중드는 아이가 물었다.
"대감께서 돌아가시면 소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갑니까?"
황희정승이,
"孔雀尙食飛蛛絲以生有何患乎
공작은 날거미줄만 먹고도 사는데 무엇을 걱정하느냐?"
라고 대답하고 아무 말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중국에서 공작 한 쌍을 조선에 보내면서,
잘 길러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사당과 신도비각 묘역 전경]
그런데 공작은 우리나라의 새가 아니므로 온 조정이 그 먹이를 알 수 없었다.
황희정승이 온갖 짐승의 생태에 대하여 박식했다는 것을 아는
조정 관리가 혹시나 하고 황희정승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문의하자,
시중들던 아이가 황희정승이 임종 시에 하던 말을 그대로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많은 날거미를 채집하여 먹인바,
과연 공작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임금이 그 아이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현명한 재상은 사후에도 나라를 위하였다고 감탄하였다
선생의 사당 아래 핀 꽃에서도 향긋한 선생의 향취를 맡아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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