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濱書院(낙빈서원)

2020. 3. 13. 05:51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95

 

[낙빈서원 안내 팻말]

 

조선시대 대구에는 5개의 사액서원이 있었다 합니다.
사액서원은 조정으로부터 서원의 현판을 하사받은 서원으로 국가공인 서원이다.

 

동구 연경동의 '연경서원', 북구 산격동의 '구암서원',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 하빈면의 '낙빈서원', 유가읍의 '예연서원'이 그것이다.
이중 '연경서원'만이 현재 미복원 상태이고 나머지 4곳은 모두 복원이 되었다.

위의 복원된 구암서원, 도동서원, 예연서원을 클릭하여 들려보셔요.^^

 

그런데 이중 '洛濱書院(낙빈서원)'은 말이 복원이지 사실은 서당 수준의 미완의 복원에 멈춰있다.

 

[낙빈서원 가는 길]

 

1694년(숙종 2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훼철되었다.


고종 말년에 유림들이 남아 있던 터에 당을 세워 보존해오다가

1982년정면 4간, 측면 1간 팔작지붕 토기와집으로 대구의 5대 사액서원 중

한 곳이자 사육신을 제향했던 낙빈서원은 이처럼 미완의 복원에 멈춰 있다.

 

[낙빈 서원 전경]

 

낙빈서원이 미완의 복원에 머물고 있는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동네에 있는 '육신사' 때문이라합니다.

 

육신사는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사육신 현창사업이 기존 파회마을의 낙빈서원이 아닌

묘골에다 새로운 추모시설 '육신사'을 건립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묘골과 파회는 인접한 마을로 둘 다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이를 분기점으로 하여 파회의 하빈사와 낙빈서원이 300여 년간

이어온 사육신 제향의 역사가 묘골의 육신사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낙빈 서원 전경]

 

세조 2년(1456)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사육신은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河緯地(하위지).
李塏(이개). 柳誠源(유성원). 兪應孚(유응부) 6명을 가리킨다.

 

박팽년 역시 아버지 형제 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9명의 남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이 있은 것일까? 임신 중이었던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가 아들을 출산한 것이다.

 

[낙빈 서원 일각문]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세조의 명이 있었지만,
성주 이씨는유복자를 낳자, 종이 낳은 딸과 서로 바꾸어 몰래 기르면서
하빈에 거주하게되었는데 그가 바로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육을 남긴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박비)이다.

 

[낙빈 서원]

 

선조 때에 이르러 박팽년의 현손인 박계창이 고조부인 박팽년의 기일에 꿈을 꾸었다.
꿈에서 자신의 집 사당 앞을 오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육신 다섯 어른을 뵌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사당에 사육신 5분의 신위를 더 설치하고 함께 제사를 모셨다.

 

[洛濱書院(낙빈서원) 현판]

[낙빈 서원]

 

인근 성주에 살고 있던 한강 정구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조언하기를
"사삿집 가묘에서 사육신 모두를 제향 하는 것은 예에 미안한 것입니다. 꼭 뜻이

그러하다면 가묘는 그대로 두고 별묘를 세워 사육신을 따로 제향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 조언에 따라 사육신을 별도로 제향하기 위해 별묘를 하나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하빈사'다.

 

[낙빈 서원 대청에서 내다 본 안산 전경]

 

하빈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숙종 1년(1675)의 일이다.
이후 1691년(숙종 17년(1691)에 낙빈서원으로, 숙종 20년(1694)에
도내 사림들의 청원으로 비로소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낙빈서원은 훼철되었다.
훼철 당시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를 서원 뒷산에다 묻었는데,

이 매판소를 한동안 假廟(가묘)로 삼았다고 한다.

 

[낙빈 서원]

 

그 뒤 일제 강점기였던 1924년 현재의 위치에 낙빈서원이 다시 복원되었다.
하지만 이 복원은 미완의 복원에 그쳤다. 사당과 동. 서재 없이 강당 한 동만

복원되었으며, 위치도 본래의 자리에서 뒤로 조금 물려 복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