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駑江書院(노강서원)

2019. 8. 20. 05:47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6-1

경기 기념물 제41호

 

[노강서원 안내팻말 전경]

 

서계 박세당 사랑채와 노강서원이 사실상 관람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한다.

그것도 모르고 들린 우린 닫힌 대문만 원망스레 바라보다 돌아왔다.

 

서계 박세당 사랑채는 조선 후기 실학자 박세당이

관직에서 물러 난 후 머물며 책을 집필하였던 곳이라 한다.

조선후기 사대부 주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으로서의 가치가 인정돼 지난 2000년 경기도 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다.

 

그 뒤쪽 위로 길을 따라가면 노강서원이 있는데,
노강서원은 조선 후기 문신 문열 박태보를 추모하는 뜻에서
건립된 서원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41호라 한다.

 

두 문화재는 모두 반남 박씨 문중 소유로 사랑채와 함께 주택에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관람은 사실상 시를 통한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합니다.

서계 선생의 사랑채는 겉모습도 담지 못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ㅠ.ㅠ

 

윗쪽 산 중턱의 묘역에도 들리지 못하였다.
그곳도 역시 가는 길이 막혀 있다.
문화재로 등록돼 유지보수를 위한 세금도 들어가고 있다는데,
사유지란 이유로 무조건 시민의 접근을 막는 것은 좀 그렇네요.

 

다행히 노강서원은 서원의 외삼문은 자물통으로 채워놓았지만,

겉모습만은 담을 수 있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노강서원 홍살문과 외삼문 전경]

[안내판 글 내용(포토스케이프에서 이어붙이기 편집)]

 

노강서원앞에 왠 뜬금없는 서계 박세당 사랑채 안내문(?)

서원의 안내문이 아니라 박세당 사랑채 안내문이었다.

 

[홍살문 안쪽 노강서원 외삼문 전경]

 

경기 기념물 제41호. 숙종 21년(1695) 건립.

1689년 己巳換局(기사환국) 때 朴泰輔(박태보)는 西人(서인)으로서

仁顯王后(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珍島(진도)로

유배 도중 鷺梁津(노량진)에서 돌아가셨다.

 

나라에서는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동시에

시호를 文烈(문열)이라 하고,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駑江書院(노강서원) 현판]

[駑江書院(노강서원) 외삼문]

 

숙종 21년(1695) 세운 이 서원은 숙종 27년(1701)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駑江(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외삼문 문틈으로 담은 駑江書院(노강서원)]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 고직사 등과

출입문이 있으며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외삼문 문틈으로 담은 동재]

 

동. 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노강서원 좌측 담]

 

서원안을 담을 수 없으니 행여 다른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협문이 있을까하고 담을 따라 걸어보았지만, 없네요.

 

[노강서원 뒤쪽에서 담은 사당 전경]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人(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담너머로 담은 노강서원 옆 전경]

 

본관 潘南(반남). 자 士元(사원), 호 定齋(정재).

할아버지는 참판 朴炡(박정), 아버지는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

朴世堂(박세당)이며, 어머니는 縣令(현령) 南一星(남일성)의 딸이다.

당숙인 世?(세후)에게 입양되었다.

 

[담너머로 담은 서재]

 

167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을 때 試官(시관)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부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서원 옆 나무]

 

분명 알았던 나무 이름이 알송달송 떠오르지 않는다.

 

[떨어진 꽃]

 

나무에서 떨어진 꽃

혹 나무잎과 떨어진 꽃을 보시고 이름을 아시는 분 계신다면

알려주셔요.

 

[수락산 석림사 일주문 전경]

 

서원을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들어 갈 수 있는 문은 없다.

윗쪽을 보니 수락산 석립사 일주문이 보여 담아보았습니다.

 

[우측 옆쪽에서 담은 노강서원 옆 전경]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될 때 부친 박세당이

"너는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조용히 죽어서 마지막을 빛내거라."라고 하자,

"어찌 아버지의 가르침을 쫓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노량진을 겨우 건너 사육신 묘 근처에서 유명을 달리하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저서는 定齋集(정재집) 14권, 편서로 周書國編(주서국편)이 있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을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서원 길 건너

앞쪽의 안내판의 안내글을 자세히 나누어 소개합니다.

 

[기개와 절의의 상징 정재 박태보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선생의 일화와 연보 참고자료 사진]

[시대의 지성 세계 박세당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글과 참고자료]

[안내판 글과 참고 자료]

[세계 연보]

[세계문화유적과 무형문화유산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글과 참고 자료사진]

[안내판 글과 참고 자료사진]

[안내판 글과 참고 자료사진]

[살구]

 

노강서원 옆 공터에 가지가 부러질듯 달린

살구를 마지막으로 담고 서원의 소개를 마칩니다.

 

'문화산책 > 향교와 서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 淸岡書堂(청강서당)  (4) 2019.12.13
晉州(진주) 龍江書堂(용강서당)  (10) 2019.12.05
전북 武城書院(무성서원)  (2) 2019.04.08
北山書阮(북산서원)  (2) 2019.04.01
군위 松湖書院(송호서원)  (2) 2019.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