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雲岡故宅(운강고택)

2015. 7. 29. 05:22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69
중요민속자료 제180호

 

 

[南故宅(운남고택) 앞 골목길]

 

어제 소개한 南故宅(운남고택)을 나와서 골목 안 쪽으로
들어가 운남고택 담을 끼고 돌아서면 막다른 골목이 보인다.

골목끝에 雲岡故宅(운강고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솟을 삼문이 있다.

 

 

[안내판 글 내용]


[雲岡故宅(운강고택) 현판]

[雲岡故宅(운강고택) 솟을삼문앞 막다른 골목]

운강고택은 逍遙堂(소요당) 朴河淡(박하담, 1479∼1560)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순조 9년(1809)에 朴廷周(박정주, 1789∼1850)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雲岡(운강)  朴時默(박시묵)이 순조 24년(1824)에 중건하고 1905년 朴淳炳(박순병)이 다시 중수하였다.


 

[중사랑채]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엇비슷히 마주보이는 건물이 중사랑채이다.
중사랑채는 책방이 1칸 있고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이 있어 서당으로서의
규모를 잘 갖추고 있으며, 왼쪽 1칸은 누마루로서 서고로 사용하였다 한다.

 

[중사랑채에 걸려 있는 篆書體(전서체) 편액]

篆書體(전서체) : 한자 글씨체의 하나로 그림처럼 표현한 글씨 모양.

보기에는 멋스럽고 좋지만, 난 정자로 쓰인 글자를 더 좋아한다.
정자로 쓰인 한문도 모르는게 많은데, 그림처럼 표현한 글자는 읽기가...좀...

편액을 쓰신 분의 성함은 정자로 쓰여 있어서 참 좋다.
李建稙(이건직)

 

[百榴園記(백류원기) 편액]

문위에는 百榴園(백류원)이라 쓴 김충현의 편액이 걸려 있다.
지금은 한그루의 석류나무도 없는듯 하지만, 예전 이 집 중사랑채의 후원 뜰에는 백그루의 석류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마구간과 고방채]

중사랑채의 우측으로 고방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고방채의 제일 끝에 마굿간이 자리하고 있다.


 

[마구간 옆 뒤쪽 통간(화장실)]

마굿간 뒤의 통간은 하인 전용이라 한다.

 

 

[큰 사랑채]

넓은 마당을 둘러싼 건물 중 왼쪽은 큰 사랑채, 오른쪽은 중사랑채인데,
큰 사랑채는 두벌대 기단을 써서 작은 사랑채보다 상위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랑채와 꽃담]

사랑채는 청지기방, 큰사랑방 2칸 대청 2칸의 5칸으로 구성되었으며 두방과 대청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에는 들문을 달아 여름에는 문을 다 들어올려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

 

 

[안채 뒤뜰로 통하는 내외문]

사랑 대청이 끝나는 뒷쪽으로는 '내외문'이라 할 수 있는 문이 있다.

이 협문은 안채에서 사랑채 후원을 지나 대문에 이르는 통로로서
내외의 구별이 엄격하던 당시에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피하여 드나들도록 마련된 문이다.

우선 안채부터 들려보겠습니다.

 

[사랑채에서 담은 솟을대문과 행랑채]

대문채는 6간으로 외양간, 곳간, 문간방 2채, 대문채, 측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보통의 솟을대문집은 대문이 집의 중앙에 와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택은 대문간을 두번째 칸에 설치하여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사랑채와 꽃담]

이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은 사랑채와 중문 사이의 '꽃담'이다.

 

[꽃담]

깨진 암수기와를 활용하여 길상을 의미하는 길할 吉(길)자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의 등처럼

보이는 문양과 그 아래와 위로는 龜甲紋(귀갑문) 비슷한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열 하여 보는이의 시선을 멈추게 한다.

[꽃담과 안채 창고]

사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마주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 보실까요.

이 주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ㅁ' 자형으로 되어 쌍 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 주택이다.

 

[행랑채와 디딜방앗간]

중문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행랑채 건물

소요당 박하담은 중종 11년(1516) 사미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청도의 운문산 아래 訥淵(눌연)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보내셨다 한다.

그 후 조정에서 그의 학행을 듣고 監役(감역) 奉事(봉사) 司評(사평) 등에 임명했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였습니다.

三足堂(삼족당) 金大有(김대유)와 교분이 두터웠고 거처 또한 가까왔으므로 조석으로 방문하여 시와 학문연구로 날을 보냈다.
또한 김대유와 함께 벽지의 향민들을 위하여 社倉(사창)을 설치하여 그들이 편히 이용하도록 하였다.

 

 

[안채]

중문 우측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雲岡(운강) 朴時默(박시묵)은 후학양성에 크게 주력하였고, 고종 9년(1872)

講學小節目(강학소절목)을 마련하여 교육기관으로서 큰 성과를 올렸으며 통정대부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뒷사랑채와 곳간]

초창기의 규모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처럼 규모가 커진 것은

순조 24년(1824) 그의 玄孫(현손)인 운강 時默(시묵)이 중건하면서부터라 한다.

그 뒤 1905년 운강의 증손인 淳炳(순병)이 다시 증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 터는 원래

입향조인 박숙이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하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뒷사랑채 뒤뜰로 통하는 문]

곳간 옆 사랑채와 연결된 2칸 방은 뒷사랑인데,
이 방은 내당 여인들이 친가에서 온 남자들과 상면하던 방이다.

뒷사랑과 안곳간은 연접되어 있는데 그 연접부의 마루 밑을 터서 문을 내었다.

 

 

[중문과 곳간채]

다양한 收藏庫(수장고)와 내외분별에 치중한 설비와 공간,
주종을 명확히 구별한 측간, 서당의 존재 등은 이 집의 합리적 구성과 다양한 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좌측에서 담은 디딜방아간과 행랑채]

[다시 담아 본 안채 전경]

雲岡故宅(운강고택)은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그 앞쪽에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한 두 개의 튼 'ㅁ'자형으로 건물들을 결합시켜 9동 80칸에 이르는 큰 집이다.

대지 1,700여 평에 2개의 넓은 안마당과 사당 앞의
백류원터, 안채 후원, 사랑채 후원 등 공간을 여유있게 두었습니다.

특히 툇마루 아래에는 두꺼운 널을 걸쳐서 여자들이 긴 치마를 입고
높은 툇마루에 오르기 쉽게 디딤돌역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놓았다.

 

 

[중문과 창고]

운강 박시묵 선생의 후손으로 운강고택과 섬암고택등을 관리하고

계시는 분께 안내를 받고 자세한 해설도 해주셔서 더 깊이 있게 고택을 둘러볼 수 있었다.

 

 

[뒷사랑채와 곳간사이 통로]

큰사랑채와 연결되는 합각지붕아래 'ㄱ'자로 달아낸
2칸의 뒷사랑채와 곳간채 사이로 큰사랑채의 후원과 연결되는 통로도 있는데,
사랑채 후원에서 內庭(내정)으로 직접 드나들기 쉽게 해 놓은 비밀통로라고나 할까요.

 

 

[장식문양]

문짝마다 붙은 장식 문양들도 다양하여 다 둘러보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

 

 

[안채 뒤 전경]

사진속에 나오시는 저분의 세심한 배려와 안내로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안채 뒷 전경을 햇볕을 피해 담으려 하였지만, 결국 피하지 못하였네요.

 

 

[칠성바위 전경]

안채 안마당도 넓지만, 뒷동산이라 부를 만큼 후원도 정말 넓다.
후원에는 바위가 7개 놓여져 있는데, 칠성바위라 부르며 신성시 한다 합니다.

 

[뒤간]

디딜방앗간 뒤편에는 2칸 뒤간을 두어
안쪽은 안방마님용 뒤간, 바깥쪽은 행랑 하인용 통간으로 구분 사용케 하였다.

 

 

[디딜방아]

현재는 전시용으로 조용히 자리하고 있으나,
그 옛날에는 분주하게 쿵덕쿵 쿵덕쿵 쉴세없이 방아를 찧었겠지요.

 

 

[중문앞에서 담은 솟을대문과 행랑채]

[祠堂(사당) 일각문]

일각문의 높이를 낮게 만들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도록 한 것에선 조상들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하였다.

 

[祠堂(사당) 앞 뜰]

[백류원 터]

지금은 한그루의 석류나무도 없는듯 하지만,
예전 이 집 중사랑의 후원 뜰에는 백그루의 석류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祠堂(사당) 출입문]

사당의 문이 닫혀 있었지만, 친절하시게도 사당문도 열어 주셔서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祠堂(사당)]

조상의 神主(신주)를 모셔 놓은 집.
또는 신주를 모셔 놓기 위해 조그맣게 집처럼 만들어 둔 곳.

 

[중사랑채 뒤 전경]

[솟을 삼문과 행랑채 전경]

[안채 뒤뜰로 통하는 내외문]

내외문 안으로 들어가 보실래요.


 

[큰 사랑채뒤편으로 이어진 작은사랑채와 곳간]

앞쪽 큰 사랑채와 'ㄱ'자로 꺾어 이어지은 뒤사랑채와 곳간이며, 굴뚝 뒤로 보이는

뒤사랑채와 광채 사이의 문으로 중문을 통하지 않고도 안채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큰사랑채 뒤 뜰에서 담은 큰사랑채와 내외문]

[큰사랑채와 이어지은 뒤사랑채]

친절하시고 꼼꼼하시게 여러곳을 소개해 주시고, 또 안내까지 맡아해주시며 닫혀있는

문도 열어주시어 고택의 안까지 둘러볼 수 있게 해주신 후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문간채와 내외문 아래의 측간]

오늘날의 화장실 옛이름도 가지가지 참 많으네요.
위에 소개한 대로 측간부터 뒷간, 칙간, 통시, 정랑, 해우소, 매화틀까지 다양하지요.
매화틀(왕의 휴대용변기)

'매화틀'의 원래 이름은 '매우틀'이라 불렀대요. 
'매'는 큰 것(대변)을 '우'는 작은 것(소변)을 뜻한다 합니다.
2개를 합쳐서 '매우틀'이라 부르다가 귀하고 높으신 왕이 쓰는 물건이라
이름으로 고쳐 '매화틀'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측간]

옛날 서양에서는 화장실문화가 빈약해 길거리에 널려 있는 똥오줌이 옷에 묻지 않게

높은 굽의 신을 신고 다녔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하이힐의 원조라고 하네요.

길을 가다가 이층에서 쏟아 붓는 요강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들고 다녔던 게 오늘날의 양산의 효시고요.
옷에 묻은 똥오줌의 악취를 가리기 위해 생겨난 게 향수라 합니다.

에궁 이렇게 알고보니 하이힐도 양산도 향수도...
쓰기가 좀 거시기하네요. ㅎㅎㅎ 

 

[솟을삼문과 행랑채 아궁이]

안내해주신 분께서 뒷간과 측간, 통간의 뜻도 알려주었지만,
적어오지 않아 까먹어 버렸습니다. 에구... 넘 아쉽네요.
하인들이 사용하던 곳, 안방마님용, 사랑채손님용 이름에 따라 쓰임새도 달랐는데...
오늘의 답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