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0. 06:25ㆍ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 160-1
경기도 기념물 제 134호
[생가 입구쪽 담벽]
답사길에 길을 묻기위해 들린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앞쪽 담벼락의 글을 읽고
이곳이 바로 해공 신익희선생의 생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우선 이곳부터 들리기로 하였다.
[조금 더 가까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 생가 골목 입구에서 해공선생을 만났습니다.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골목입구에는
'사마루, 지는 노을에 해공 선생을 만나다.'라는 글이 제일 먼저 반겨주었습니다.
사마루는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나던 네명의 고려충신이
마을의 모습이 누각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신익희 선생의 주요 업적과 발자취를 소개하고 있었다.
[해공선생 어록 담장]
골목안으로 들어가보았지요.
생가로 꺾어드는 담벽에도 해공선생의 어록이 정겹게 다가왔다.
선생의 생전 강조하셨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어록이 있습니다.
어록이 적힌 담장을 지나 우측으로 꺾어들면 곧장 생가로 향할 수 있습니다.
[생가 앞에서]
골목길에서 담은 생가 일각문과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안내석]
[생가 일각문]
생가는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된 목조 기와집으로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9세기 또는 20세기 초의 경기 지역 중소 지주계층의 가옥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萬仰亭(만앙정) 현판]
[萬仰亭(만앙정) 전경]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의 생가이다.
정면에서 보이는 생가의 바깥채는 'ㄱ'자형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좌측에 2칸의 사랑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안채 대문]
안채 대문을 통해 생가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대문에서 담은 좌측 바깥 사랑채 전경]
[대문에서 담은 안채]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안채 전경]
고종 2년(1865)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옮긴 건물은, 전체적으로 20세기 초에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추측하며, 2002년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된 뒤 1년여만에 복원되었다.
[안채 중앙 마루에 걸린 주련]
안채는 T자형 평면을 이루는데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을 두고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으로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으며. 바깥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왼쪽에 2칸 사랑방을 두었다.
[안채 안방에 붙여지은 부엌]
이 집은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20세기 초 경기지역 중 소지주 계층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물과 장독대]
[생가 옆 마당]
申翼熙(신익희, 1894~1956)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평산으로 자 如耉(여구), 호 海公(해공), 海候(해후)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다.
[일각문]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5년 2월에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촉성국민회,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에 백의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일각문에서 담은 전경]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선생의 가르침을 담은 비석과 선생을 기리는 많은 분의 글이 담긴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담아온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감상해 보셔요.^^
선생 생가 후원은 선생의 글귀를 새긴 돌비석,
선생에 대한 추모의 글귀를 모은 8각 돌비석 등으로 꾸며 놓았다.
[일각문에서 담은 앞쪽 전경]
아주 어릴적 뜻도 모르면서 불렀던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옆 마당에서 담은 생가]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두고 조박사는 떠나가네
가도 가도 가망없는 당선길은 몇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이 노래는 반야월 선생이 작사한 유정천리란
노래에 가사를 지어 불렀던 것 같아요.
[생가에서 담은 생가 대문 전경]
돌아가시기 전 1956년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선생의 유세 때 무수한 인파가 모여 신익희 선생의 지지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가셨지만, 추모표로서 186만여 표가 던져졌다고 하니, 많은 국민들이 선생을 믿고, 따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정부에서는 신익희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선생의 생가는 경기도 기념물 134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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