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0. 06:34ㆍ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
시도기념물 제 26호
[丹齋軒(단재헌) 전경]
申采浩(신채호, 1880∼1936) 한말 일제시대에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으며 26세 때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가 되었다.
1905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그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을 써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였다.
[丹齋軒(단재헌) 옆 쉼터]
[獨立有功者(독립유공자) 丹齋申采浩先生遺墟碑(단재신채호선생유허비)]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임통치에 반대하였다.
[생가 가는 길]
단재 신채호선생의 생가지로 가는 길은 두갈래길이 있다.
단재헌 옆 쉼터옆으로해서 가는 이 길과 선생의 유허비 뒤쪽으로 해서 가는 길이 있었다.
우린 쉼터옆으로해서 가는 이 길을 택하여 단재선생의 생가지로 향했다.
[생가 가는 길 옆에 세워진 쉼터]
앞에 보이는 쉼터 뒤쪽으로 보이는 초가 두채가 바로 선생의 생가지터이다.
[옆쪽에서 담은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 전경]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 운동사상 가장 강건하고 웅장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문서로서 손꼽히고 있다.
[단재 선생의 동상 전경]
생가지 앞쪽 넓은 터에 세워진 단재선생 동상
[단재 선생 동상]
[丹齋申采浩先生像(단재신채호선생상)]
[신채호선생 상 옆 안내판 글 내용]
[생가 와 안내판 전경]
선생이 태어나 8세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한다.
이곳 도리미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안내판 글 내용]
[동상쪽에서 담은 생가 전경]
8세에 아버지를 여의게되자 충복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단재선생 생가지 비]
[대문에서 담은 생가 전경]
[안내판 글 내용]
丹齋精舍(단재정사) 마루 옆에 비치해둔 책장속에
서너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짧은 시간에 책을 다 읽지는 못하지만, 책장을 열고
선생이 쓴 책을 가만히 가슴에 품어보곤 다시 책장속에 넣어 두었다.
[丹齋精舍(단재정사) 현판]
[丹齋精舍(단재정사)]
1992년 여름에 생가터에 대한 발굴조사와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하여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단재정사 옆 창고 건물과 장독대]
[단재정사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1924년 동아일보 등에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논문들은 1930년 '조선사연구초' 라는 한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떠나기전 인증샷 한컷]
[생가 돌담과 함께 담아본 신채호선생 동상 전경]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旅順(여순)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다가, 1936년(음 1월28일) 가장 위대한 근대 민족주의 역사가요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선생은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외롭게 향년 57세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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