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山(백산) 安熙濟(안희제) 선생 生家(생가)

2015. 10. 27. 06:41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번지
경남문화재자료 제193호

 

 

[ 백산 안희제선생 추모비]

 

추모비 소재지 : 경남 의령군 의령읍 동동리 380-2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이며 민족자본의 육성자,
영남지방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선생의 업적이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白山 安熙濟先生(백산 안희제 선생, 1885~1943)
선생은 1885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나셨다.
호는 白山(백산).

 

7살 때부터 선생은 향리에서 집안의 형인 안익제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매우 영민하여 문리를 쉽게 터득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19세이던 1903년 7월 선생은 정석신 등 의령, 합천, 삼가, 진주,
하동 등지의 선비들과 지리산과 섬진강 일대를 유람하며 32수의 한시를 지어
'南遊日錄(남유일록)'에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뒤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이던 중,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그해 2월 23일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 할 수 있도록 한
'韓日議定書(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영토를 점유하여 갔고, 또 8월 22일에는 '韓日協約(한일협약)'
강제하여 顧問(고문)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여 갔다.

 

 

[백산 안희제선생 영정]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양해 아래
1905년 11월 18일 '乙巳勒約(을사륵약)'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조국이 이같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古書(고서)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孔孟(공맹)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山林間(산림간)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상경하여 신학문을 익힐 뜻을 집안 어른들께 밝혔다.

 

이는 선생이 서울에서 신학문을 습득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그를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려고 한 까닭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에

養正義塾(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 서양의 선진 학문을 접목하여 갔다.

 

이 때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의 교육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白山 安熙濟先生 生家(백산 안희제선생 생가)와 안내판]

 

그것은 을사륵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한편에서는 즉각적

항일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적인 구상으로

각계각층에서 구국계몽운동을 펼쳐가던 당시 민족사회의 분위기와 그에 대한

선생의 자각이 크게 작용한 탓이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龜浦(구포)에
龜明學校(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면에 宜新學校(의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徐相日(서상일)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大東靑年黨(대동청년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白山 安熙濟先生 生家(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대문]

 

1914년에는 白山商會(백산상회)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己未育英會(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독립운동가를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요, 민족언론의 선구자이면서 독립투사였지만
즐겨 카이제르 콧수염을 기르고 다니며 언제나 멋을 아는 신사였다한다.

 

 

[대문에서 바로 보이는 우물]

 

어릴 때부터 총명하며 창의성이 풍부했고

말이 나오면 청산유수 같이 좌담에 능했다고 한다.

 

27세때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하였다. 


30세에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본금을
마련하였으며, 기미 육영회를 조직하고 1926년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다.

 

1911년 러시아 망명 등을 거쳐 1914년 귀국한다.
망명 중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에서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해산물, 농산물을 취급하는

무역상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중국 대륙 등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연결하는 국내 거점이었다.

 

안희제는 국내에는 서울, 대구, 원산 등 18개소,
중국에는 안동, 봉천, 길림 등 3개소에 백산상회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만들어 임정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임정에 어느 정도의 자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자금을 주고받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로 자금조달 자체가 극비리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다만 안희제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들이 구술로 전해지고 있다.

 

 

[白山 安熙濟先生 生家(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백산은 이른바 '임정36호'의 국내 책임자로 미국 중국의 첩보조직과
연계를 맺고 활동하셨으며, 임정 운영자금의 60%를 조달했다고 한다.

백산상회가 벌어들인 거의 모든 돈을 임정에 보내,
상회는 항상 적자 상태였다. 

국내 갑부나 주요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한 돈을 임정으로
전달하는 일도 도맡았다.

변장술에 능하여 족적이 항상 신비로워
총독부에서도 그를 정체불명의 인물로 보았다.

 

백산은 때때로 금테안경에 일본옷을 입고 다녔으며 단장을 짚고 다니기도
하였으며, 그는 어디를 가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고급호텔에 투숙함으로써
일경의 시선을 따돌렸다.

 

안희제가 경주 갑부 최준 집에 강도 복면을 하고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최준에게 여러 차례 헌금을 받아 면목이 없고, 거절당할까 두려워
강도로 위장했으나 결국 안희제 본인임을 밝힌 뒤 약속어음을 받아나갔다.

 

최준은 자의로, 때로는 안백산의 강권에 의한 타의로
엄청난 액수의 독립자금을 내놓으면서 그 돈이 그대로 모두
상해 임시정부로 전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백산도 생활을 해야 하고, 또 상해로 오가는 여비며 활동비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해방 뒤 김구와의 만남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돈과 김구가 받은 돈이
일치한 것에 감격, 조금이나마 안희제를 의심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경교장 남쪽으로 난 창을 열고 안백산이 묻힌 경남 의령을 향해 절을 하며
대성통곡했다고 전해진다.

 

김구 선생도 함께 울었다한다.
백산 안희제선생과 관련된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다.

 

 

[白山 安熙濟先生 生家(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2]

 

신한청년단원이었던 장덕수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안희제는 1919년 2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여비 일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은 민초들의 십시일반에서부터

거부들의 쾌척, 해외동포들의 모금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일제시대 자금 조달은 목숨을 건 행위였으나 많은

독립운동가, 재산가, 민초들이 기꺼이 큰돈을 내놓거나

조달활동을 펼치며 독립운동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우당 이회영((1867~1932)은 현재 8백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다 처분해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쳤다.

 

항일투쟁에 진력하던 중 1932년 독립운동 세력 규합과

주만 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향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1월 17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셨다.


우당의 나이 환갑이 지난 66세였다.

김용환(1887∼1946)은 대를 이어 내려오던 전답 500여 마지기와
임야 200여 마지기등 18만평 가까운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1911년 거액의 독립자금을 만주에 전하다 세차례나

체포됐으며 1922년에는 비밀결사단체인 의용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김용환은 특히 노름판을 출입하며 거금을 잃는

수법으로 독립자금을 만들어 만주로 전했다.


이런 활동을 주위에 숨겼던 김용환은 노름판 출입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파락호'로 손가락질당하기도 하였다한다.

 

 

[白山 安熙濟先生 生家(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3]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의 생가이다.
독립운동가로 창남학교, 의신학교 등을 설립하여 신학문 보급에 힘을
썼으며, 민족언론의 선구자 역할도 하였던 분으로 5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생가는 안채, 사랑채 2동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이다.

 

왼쪽에서부터 마루, 방, 대청, 방, 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의 초가 건물로 안채와 바짝 붙어 있다.
이들 건물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으로 마루를 1칸씩
구성하고 있어 특이하다.

 

또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방이 필요한데도 별도의 건물을 두지 않고
한 건물 내에서 해결하는 조선시대 후기의 민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白山 安熙濟先生 生家(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4]

 

해방이 되고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선생이
제일 보고 싶어 한 사람 白山(백산) 安熙濟(안희제). 백범은 백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목놓아 통곡을 하였다한다.

 

백산은 틈이 있을 때마다 애국지사인 성재 이시영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으며,
성재의 각별한 지도아래 이원식, 서상일, 윤세복 등 동지 80여명을 규합하여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세기 중엽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 당한 후,
그 수모 속에서 절치부심으로 이룩한 것이 바로 메이지유신이다.

 

약 30년에 걸친 이 거대한 체제개혁은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들었으며,
마침내 일본은 자신이 미국에게 당했던 동일한 방법으로 조선에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까지 감행하였다.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과 만나 항일구국의 투쟁 방안을 논의했다.

 

 

[장독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만주에 도착한 백산은
남북만주에서 활약하는 독립투쟁단체를 일일이 방문하고 독립운동지도자들과
구국의 방책을 논의했으며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인재육성 등 독립운동의
국내연락책을 맡아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 각 유지들이 기탁하는 자금을 송금하는 일까지 맡아왔으며
자금의 연락방식은 항상 장부상 거래의 형식을 취해 좀처럼 일경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일경은 그 기밀을 눈치채 수차 회사를 검색하고
정부를 압수해 가고 백산을 연행해 갔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드러나지 않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부엌]

 

1942년, 마침내 귀국해 향리에서 생활을 하던중,
중국에서의 독립행적이 드러나 11월15일 만주의 목단강성
경무청에서 찾아온 3명의 형사에 의해 백산은 병상에서 붙들려 갔다.

 

만주땅 목단강 경무청에 붙들려 온

백산은 연일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백산은 9개월 동안 무려 70여회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이듬해 빈사상태에서 병보석으로 출감되었다.

 

출감한지 3시간, 가족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던 중
백산은 오직 나라와 겨레 위한 파란만장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니,
조국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8월 3일이었다. 향년은 59세였다.

 

백산은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

"일제가 패망할 날이 목전에 왔으니 지금에 죽는
나는 아무 여한이 없다."
고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엌 2]

 

1962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나라와 겨레 위해
일생을 바친 백산의 공적을 기렸으며, 1958년 의령군 내의 유지들이 발기하여
백산회관 건립 기성회를 발족해 1975년 3월1일 의령군 의령읍 중동에
백산도서관을 신축 개관하고 이듬해에는 '백산추모비'도 건립하였다.

 

의령군민의 성원과 국내외의 향토출신 독지가들의 협찬으로 1

976년 12월20일 백산육영회를 발족시켰으니 이는 백산의 기미육영회의 후신으로

백산의 거룩한 구국정신을 계승하여, 향토출신의 인재양성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백산의 정신이 고향 의령에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있다.

백산 안희제선생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분이시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지만 이런 어르신들이 어디 한 두분이시겠는가
우리들의 기억에서 조차 잊혀져간 어르신들의 희생덕분으로
나라도 되찾고 오늘의 우리도 있는것이나 아닌지...

 

 

[白山 安熙濟先生 生家(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4]

 

33인을 규합하기 위해 육혈포를 들고 나섰던 만해 한용운이

해방을 목전에 두고 쓸쓸히 조선총독부를 뒤로 한 채 북향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잠든 것과 같이, 백산이 해방 전에 영면한 것은 차라리 행복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행복은 해방 이후의 민족 분단을 목격치 않을 수 있었음이며,
백범이나 죽산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죽어나가는 비극을 보지않음을
행복이라 하였다.

 

어찌 생각하면 오래 살아 모든 고통을 눈으로 몸으로 겪는것 보다
나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59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선생의 나이가 너무 아까우시다.

 

조금만 더 사셔서 조국이 해방되시는 것을 보시고 가셨으면
하는 애타는 마음이 뭉클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으로 눈앞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