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1. 06:28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花石亭(화석정) 현판글씨]
[花石亭(화석정)]
임진강가에 세워져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栗谷 李珥(율곡 이이, 1536~1584)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원래는 고려 말 대학자인 冶隱 吉再(야은 길재)의 遺址(유지)가 있던
자리라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 후 세종 25년(1443년) 율곡 李珥(이이)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것을 성종 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夢庵(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栗谷 李珥(율곡 이이,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아명은 見龍(현룡), 자는 淑獻(숙헌), 호는 栗谷(율곡), 石潭(석담)
시호 文成(문성) 본관은 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일곱남매중 셋째아들로 중종31년(1536)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花石亭 詩(화석정 시) 八歲賦詩(8세부시)]
그 후 李珥(이이)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 황혼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화석정은 풍광좋은 임진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임진왜란때에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몸을 태워서 환하게 밝혀주었다고 한다.
강릉외가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따라 서울 수진방의
친가로 올라온 어린 율곡은 나이 여덟 살 때 이곳 화석정에 올라와 시를 지었다 한다.
그 시가 화석정안에 걸려 있다.
[花石亭 詩(화석정 시)]
화석정 옆 뜰에도 시 비가 세워져 있었다.
[詩碑(시비) 전문]
[시비 아랫쪽 안내글 내용]
[느티나무와 花石亭(화석정)]
'花石亭(화석정)'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이 시는
율곡이 8세 때 공부하다가 바람 쏘이려고 정자에 올라 무심코 읊은 詩(시)라한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어린나이에 이런 시를 읊겠는가....
가을에 지은 율곡의 시는 마침 늦가을에 도착한 나그네의 마음도 함께
실어 그 뜻을 다시 한번 새겨보았다.
[花石亭(화석정)에서 임진강을 내려다 보고]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꽃돌정자'라는 이름의 花石亭(화석정)은
율곡선생님의 5대조인 康平公 李明晨(강평공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에
세운 뒤 증조인 李宜碩(이의석) 대에 증축하여 대물림하여온 정자이다.
그 후 이곳은 율곡선생님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500여년 된 느티나무]
화석정의 뜰에는 이 정자를 지은 율곡선생님의 5대조 이명신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단풍으로 곱게 물든
나뭇잎을 바람에 흩날리며, 말없이 흐르는 강변을 굽어보는 절경 자리에
화석정이 있었다.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윈 율곡은 3년 동안 자운산 선영에서
시묘살이를 마친 후, 금강산에 들어가기 직전에 成渾(성혼)을 처음 만났다.
열아홉살의 율곡과 스무살의 성혼은 이후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성혼은 원래 창녕사람이나 화석정이 있는 곳에서 6킬로 정도 떨어진
지금의 폭포어장이 있는 牛溪(우계, 파평면 늘로리)에 살았다.
우계는 그의 호가 되었다.
성혼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선비였으나,
현실 문제를 파악하고 개선하려 노력하였던 실학자적 성격도 아울러 지녔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화석정 아래 임진강에 작은 배를 띄우고 놀았다.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어 배가 기우뚱거리자 성혼은 놀라며 허둥댔는데,
율곡은 뱃머리에 서서 태연스레 시를 읊었다.
성혼이 놀라며,
"어찌 변화에 대처하는 도리도 듣지 못하였단 말인가?"하자,
율곡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익사할 리가 있겠는가."
조금 후에 풍랑은 가라앉았다.
성혼과 율곡은 친구 송강 정철의 생일잔치에 초대되었는데,
가서보니 기생들이 함께 있었다.
고지식한 성혼은 기생을 못마땅히 여기었지만, 율곡은 웃으며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도 하나의 도리라네"
하며 함께 잔치를 즐겼다.
평생의 반려된 친구로 지내다가 율곡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성혼은 그보다 14년을 더 살면서 율곡을 잊지 못해 그의 奇日(기일)이
되면 늘 소복을 입었으며, 율곡의 인품과 우정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기곤 하였다한다.
[花石亭(화석정)에서 멀리 임진각을 바라보며]
1584년 율곡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
몇 해 안 있어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났다.
선조임금은 서울을 빠져나와 북녘 멀리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임진강 나루에 도착한 임금님의 일행은 뱃길을
잡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에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이 때 율곡선생님의 화석정은 임금님의 피난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피난길을 인도하던 문신 이항복은 미리 단단히 기름칠을 해두었던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명령했으며 불타는 화석정을 등불로 삼아 임금과 백관,
호위 군졸을 태운 배는 무사히 강을 건너 피난할 수 있었다.
[花石亭(화석정)앞에서 인증샷]
율곡선생님께서 왜놈의 침략을 미리 예견하시어 일찍이
화석정에 기름칠을 하여 두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율곡은 화석정을 고치면서 관솔을 썼고,
이곳에서 默想(묵상)을 할 때면 항상 기름걸레로 기둥과 바닥을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그 후 세월이 흘러 壬辰年(임진년) 4월 그믐날, 퍼붓는 비를 맞으며
선조의 蒙塵(몽진) 행렬이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비바람 때문에 등불을
밝힐 수 없어 지척을 분간할 길이 없었다.
이 때 도승지 李恒福(이항복)은 율곡의 유언을 떠올리며
봉투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솔에 기름을 먹여두었기에 퍼붓는 비에도 아량곳 없이
훨훨 타올라 선조 일행을 무사히 강을 건널수 있게 하였다 한다.
율곡 이이 선생은 파평 율곡리 출신이다.
과거를 아홉번이나 연달아 장원한 천재적인 이이선생은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살까지 그곳에서 지내다가, 그 후 아버지의 고향인
이 동네로 옮겨와 성장하였다.
이곳 파평 율곡리는 밤나무가 많은 동네인데 그 동네 이름을 따서
李珥(이이)는 栗(율, 밤나무 율) 谷(곡, 골짜기 곡)이라는 호를 붙였다.
율곡의 예지력을 보여주는 또 한편의 일화가 있다.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것이 8년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명나라
원병을 청해야하는 딱한 처지에 놓였다.
이여송이 이끄는 4만 원군이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 때 접빈사로 나선 이항복은 외교 관례상 感泣(감읍)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 처지였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 때 이항복의 뇌리에는 율곡선생의 가르침이 생각이 나서,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넣고 가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
상대방의 눈에는 감격해 맞이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눈물로 장수의 마음을 움직여서 싸움에 참여하게 하였다한다.
[꽃과 노니는 나비]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반쪽 북녘 땅을
저 멀리 바라보며 율곡선생님의 화석정과 황희정승의 반구정은
그렇게 냉가슴 앓으면서 임진강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평화로이 이꽃 저꽃으로 옮겨 앉는 나비는
그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라보는 나그네의 심정에도 아픈 회한이 겹겹이 쌓이고...
언제쯤이면 통일된 조국에서 마음놓고 오고갈 수 있을지..
그날이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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