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2. 06:18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 127
경기도 기념물 제 29호
[淸政門(청정문)과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방촌선생 기념관]
朝鮮初期(조선초기)의 名相(명상)이며,
淸白吏(청백리)의 대표격인 尨村 黃喜(방촌 황희, 1363∼1452)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는 곳이다.
황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고 世宗年間(세종연간)에는 영의정이 되어
왕을 도와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삶을 통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文宗(문종2년, 145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廟庭(묘정)에 배향하고, 世祖(세조원년, 1455)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伴鷗亭(반구정)영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후 이 영당은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것을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건물 주위엔 방형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정면의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호를 따라 尨村影堂(방촌영당) 이라고 한다.
[淸政門(청정문)]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 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 한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록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후, 1383년 사마시에 오르고 138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창왕1년(1398)년 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현 적성면)훈도, 고려조 때 성균관학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태조 3년(1394)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되어 세자우정자를 겸임한 후
직예문춘추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397년 11월 문하부우습유로 재임중
부모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선공감 정란의 직무가 기복시켜
관직 에 임명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직첩에 서경하지 않아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月軒祠(월헌사), 影堂址(영당지), 景慕齋(경모재) 전경]
기념관 정면에 나 있는 작은 솟을 대문(창의문)을 들어서면
황희선생 영당지와 경모재 선생의 동상 반구정 앙지대를 보게 된다.
널찍한 마당에는 잘 정돈된 고택(古宅)과 방촌의
동상이 있고, 뒤쪽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29호인 영당이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70여명의 고려 遺臣(유신)들과 함께
杜門洞(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풀 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었다.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가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했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흔히 말하는 杜門不出(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月軒祠(월헌사)와 黃喜先生 影堂(황희선생 영당)]
결국 태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협박하기에 이르고,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고려유신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것 역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중 나이가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가
조선 조정에 홀로 出仕(출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에게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황희정승 영당내 景慕齋(경모재) 전경]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정계에 유력자로 부상된 것은
1405년 12월 왕명의 출납을 총괄하는 승정원지신사가 되면서부터 이다.
그 당시 태종의 총애을 받던 박석명이 5년간 재직하던
지신사를 사임하면서 그 후임자로 좌부대언인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였는데, 좌부대언에서 지신사로 승진된 것은 당시의 인사 관행상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1406년 박석명이 죽은 후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각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책봉된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정계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된 것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경모재 앞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景慕齋(경모재)]
그는 공신이 아니었으면서도 공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태종은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나 볼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다.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는 태종이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오."
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경모재 뜰앞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내고 있는 관리하시는 분.
쓸고 또 쓸어도 또 다시 낙엽은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애써 쓸어모아둔 낙엽은 휙 불어오는 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린다.
[황희정승 동상]
경모재 옆에는 커다란 황희정승
동상이 임진강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다.
[尨村先生 影堂(방촌선생 영당) 앞 삼문]
[안내판 글 내용]
[尨村先生 影堂(방촌선생 영당) 현판]
[尨村先生 影堂(방촌선생 영당)]
尨村先生(방촌선생)의 영당 현판이 걸린 影堂(영당)의 모습
성품이 너그러워 하인과 그 자식들도 어려운 줄 모르고 스스럼없이 대하여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였으나 한번도 성내 꾸짖거나 매질하는 적이 없었다 한다.
보다 못한 부인이
"아유! 집에서 저런분이 어떻게 정승 노릇을 하며
막중한 나라 일을 보실 수 있을까" 하고 핀잔하자,
"婢僕(비복)도 다 하늘이 내려준 이 땅의 백성인데 어찌 가혹하게 부리겠소"
했다고 하니, 그의 따뜻한 愛民精神(애민정신)과 투철한 人本思想(인본사상)은
시대를 훨씬 앞서 갔음을 알 수 있다.
[月軒祠(월헌사)] 일각문과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月軒祠(월헌사)]
月軒祠(월헌사)는 방촌선생의 고손인
소양공 월헌 황팽헌(1472~1535)선생의 주를 모셔놓은 부조묘이다.
월헌선생은 방촌선생의 증손인 부사관의 아들이며,
문장 글씨로 소세양, 정사룡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는 명나라에서 격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舍直齎(사직재) 현판]
[舍直齎(사직재) 전경]
방촌 선생 遺墨(유묵)에서
靑山臨黃河(청산임황하)
푸른산 황하까지 다달았는데
下有長安道(하유장안도)
산밑에 장안까지 가는길이있구나
世上名利人(세상명리인)
세상에서 명리만 쫓는나람들은
相逢不知老(상봉불지노)
서로가 만나도 어른됨을 모르더라.
당나라 때에 지었다는 이 詩(는)
방촌 선생께서 반구정에서 소일할 때 쓰신 유묵으로
전해오는 데, 원본은 지금 상주 종친 댁에 보전되고 있다한다.
당촌(휘 위)께서 편찬한 '방촌 문집'에 등재되고,
문산읍 반구정에 세운 방촌 동상 좌대에도 음각되어 있다.
복사본은 진안 안천 화산서원 등 여러곳에 많이 비치되어 있다한다.
[伴鷗亭(반구정)과 仰止臺(앙지대)]
이곳은 다른 게시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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