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2. 06:20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22
경기도 문호재자료 제 12호
[伴鷗亭(반구정) 전경]
경모재 앞 마당 건너에는 강바람을 막기위해
일부러 쌓아놓은 양 제법 높은 언덕이 성곽처럼 서 있다.
위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사이로 숨은듯한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반구정과 앙지대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이름 높은 재상인 방촌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 '伴鷗亭(반구정)'라는 이름을 지었다.
'伴鷗亭重修記(반구정중수기)'와 '伴鷗亭記(반구정기)'
그리고 한글로 옮겨진 '반구정 중건에 붙이는 글' 등
여러개의 편액이 있다.
[반구정 안내판 글 내용]
[伴鷗亭(반구정)]
임진강변 언덕위에 세워진 반구정은
현재 경기도 문화재 1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임진강 낙하진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洛河亭(낙하정)'이라 불리다가 이후 언제부터인가
伴鷗亭(반구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기암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푸른 물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송림이 울창하여 좋은 풍경을 이루고 있다.
[仰止臺(앙지대)]
仰止臺(앙지대) 현판은 일중(김충현)님의 글씨다.
반구정에서 남쪽으로 바로 이어진 등성이 위쪽에는
또 하나의 정자가 멋드러지게 서 있는데, 그 곳까지 층계가 나 있다.
정자의 크기는 반구정보다 작고 6각형인데,
이름하여 仰止臺(앙지대)이다.
앙지대는 원래 반구정이 있던 자리라한다.
1915년 반구정을 현 위치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방촌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하였다.
앙지대 상량문에
'오직 善(선)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시경)의 호인(호인)이라는 뜻을 취했다'고 적고 있다.
정자 내부에는 1973년 3월에 이은상이 쓴 중건기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후손이 쓴 현판시가 하나 걸려 있다.
정자는 단청도 화려하고 잘 보존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 곳이 5백여 년 전에 방촌선생이 소일하던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감회가 깊었다.
옛기록에 의하면 황희가 살던 그 시절의 경치는 지금보다도 더 좋았던 것 같다.
바다가 가까워 바닷물이 들고 날때마다 하얀 갈매기가 모래톱 가득 내려앉고
날이 맑으면 개성의 송악산 까지 볼 수 있었다니 말이다.
지금처럼 남북이 가로막혀있지도 않아서 틈나면
임진강에 배 띄워놓고 한가로이노닐 수도 있었을 태니까...
지금보다 훨신 자연과 벗하며 지내기가 좋았으리라..
[仰止臺(앙지대)에서 내려다 본 伴鷗亭(반구정)]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볼때 조선조초기 황희정승같은
위대한 정치인이 계셨다는 것은 후대의 우리들에게도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선생에 대한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학교생활을 통해 배우고 익혔지만,
그 분의 뜻을 올곧게 이어오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알고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오늘의 교훈으로 삼고자
선생의 수많은 일화중에서 몇가지 적어 올려봅니다.
종복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밥을 빼앗아 먹고 떠들어대며
수염을 잡아당기고 뺨까지 때려도 그저 '아프다 아파'할 뿐
노여워하지 않는 호호야-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자상하면서도 엄해 말을 건네거나 웃는 적이 드물었다.
선생의 3남 守身(수신)이 기생과 사귀어 관계를 끊지 못하자 어느날 선생이
관복을 갖춰 입고 문밖까지 나와 아들을 맞이했다.
수신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그 까닭을 묻자
"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손님으로 알고
이렇게 맞이하는 것이다" 하였다.
수신은 이로부터 기생을 만나지 않았다.
[仰止臺(앙지대)에서 본 伴鷗亭(반구정)]
내려다 보이는 임진강의 풍광은 시원스럽다.
언제쯤 통일이 되어 이 임진강을 건너 마음놓고 오갈 수 있을까?
황희 정승은 좌천, 파직, 귀양살이 등을 당하면서도
60년간의 관직생활을 통해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돕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갈매기를 벗 한다는 또 다른 정자인 狎鷗亭(압구정)은
세조때의 韓明澮(한명회)가 자신의 호를 따서 한강변에 지은 정자였으나
정자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압구정동이 되었고 지금의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이 그자리였다고 한다.
압구정이 바로 그 압구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압구정에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데, 고려의 충신, 조선최고의 재상 황희정승의
반구정에는 드문드문 찾아드는 객들이 오고 갈 뿐 조금은 쓸쓸하다고 할까.
원래는 앙지대 자리에 반구정이 자리하고 있었다한다.
6.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복구하면서 조금 아래 자리로 내려와 앉혔다한다.
그곳에 근무하시는 문화재해설사님께 들은 이야기.
許穆(허목)의 반구정기 伴鷗亭記(반구정기)에
'조수때마다 백구가 강위로 몰려들어 모래사장 벌판에 가득하다.'고 하였다.
[伴鷗亭(반구정)]
정자에서 바라보는 임진강너머로 지는 낙조 또한 일품이었으리라,
청백리 황희선생이 어찌 더 이상을 무엇을 탐낼 수 있었으랴!
말년에 좌의정 자리를 내놓고 이 곳으로 내려와 갈매기와 벗하며 노닐 무렵
그가 지은 시 한편이 있다.
대초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르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지나가니 아니먹고 어이리.
황희는 조정에서 물러난 지 3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그의 나이 90이었으니
천수를 누리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일생이었다.
[인증샷]
현판은 일중(김충현)님의 글씨다.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볼때 조선조초기 황희정승같은 위대한 정치인이 계셨다는
것은 후대의 우리들에게도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선생에 대한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학교생활을 통해 배우고 익혔지만,
그 분의 뜻을 올곧게 이어오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알고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오늘의 교훈으로 삼고자
선생의 수많은 일화중에서 몇가지 적어 올려봅니다.
종복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밥을 빼앗아 먹고 떠들어대며 수염을 잡아당기고
뺨까지 때려도 그저 '아프다 아파'할 뿐 노여워하지 않는 호호야-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자상하면서도 엄해 말을 건네거나 웃는 적이 드물었다.
선생의 3남 守身(수신)이 기생과 사귀어 관계를 끊지 못하자 어느날 선생이
관복을 갖춰 입고 문밖까지 나와 아들을 맞이했다.
수신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그 까닭을 묻자
"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손님으로 알고
이렇게 맞이하는 것이다" 하였다.
수신은 이로부터 기생을 만나지 않았다.
[伴鷗亭(반구정)에서 내려다본 影堂址(영당지)]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하고 나서 병조판서를 제수받아
임금의 대우가 융숭하자 어느날 公會(공회)때 술이 거나하여
비스듬히 앉았는데 수상으로 있던 선생이 이를 보고 小史(소리)에게
"지금 병판의 앉은 자세가 바르지 않으니 의자의 다리를 고치도록 하라"
고 일렀다.
장군이 듣고 너무도 황공하여 머리끝이 저절로
쭈뼛해짐을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한다.
"내가 육진을 개척할 당시 밤중에 적의 화살이 날아들어 책상머리에
꽂혔어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식은 땀이 적시려는구려"
천성이 검소하여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집안은 늘 가난하여 방바닥에 멍석을 깔고 지내며
"이 자리가 참 좋구나. 까실까실하여 가려운데를 저절로 긁을 수 있으니"
하던 방촌, 87세에 조정을 물러난 그는 조용히 만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뜰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창밖에 복숭아가 익자 동네 개구장이들이 이 녀석 저녀석 다
몰려들어 마구 따먹었다.
방안에서 책을 보던 황정승은
벙긋 웃으며 내다보다가 잔잔한 목소리로 일렀다.
"얘 이놈들아, 다 따먹지는 말아. 이 할래비도 맛 좀 봐야지"
잠시후 나가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고 빈 나무 뿐이었다.
황정승은 허허 웃었기만 하였다한다.
[영당 쪽에서 담은 반구정, 앙지대 전경]
白鷗(백구)야 껑쩡 날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聖上(성상)이 버리시매
너를 좇아 예 있노라
이 노래는 우리 나라의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단가의 한 귀절이다.
'껑쩡'이라는 말에는 익살끼까지 있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옛날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던 사람이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생생하게 나타내었고,
자연을 그리는 마음 중에는 물가에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흰 갈매기 떼가 가장
신비롭게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런 노래가 생긴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강가에서 물새와 노닐 때도 어부들은 그가 당대의 명재상이
였던 것을 몰랐다.
반면 한명회는 자신의 딸 두 명을 왕비로 바치고,
부귀영화를 누린 뒤, 말년에 갈매기와 노닌다는 압구정을 짓고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
젊어서는 사직을 돕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라는 싯구를 붙여놓고 거드럼을 떨었다.
나중에 김시습이 그 글을 보고는 가가대소하면서
扶(부)를 亡(망)으로, 臥(와)를 汚(오)로 고쳐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로 바꿔 버렸다.
5백년이 지난 요즘에도 김시습의 개작시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젊어서부터 세상을 망치기 시작해 늙어서도 악착같이 욕심을 부리는 공명에
탐한자들..... 오늘날 황희정승 같은 분이 새삼 간절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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