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6. 05:54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1247-5
[재실 삼문 전경]
[옆쪽 담 너머 담은 재실 전경]
재실 삼문은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기에, 묘역으로 가기 전 재실 옆 담너머로 담아 본 재실 전경
재실에서 좌측 포장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묘역으로 오르는 우측길이 보인다.
[묘역 근처에 도착하여 담은 전경]
포장된 길이 끝나는 곳에 계단을 오르면, 처음 보이는 묘역이 탁영 김일손선생 묘소이다.
[입구 쪽에서 담은 묘역 전경]
[탁영 김일손과 부인 예안김씨 묘역 전경]
좌측 탁영 김일손 묘. 우측 정부인 예안김씨 묘이다.
[문민공 탁영선생 묘비석]
[탁영 김일손 묘]
金馹孫(김일손, 1464~1498) 조선 성종. 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 김해, 자. 季雲(계운). 호. 濯纓(탁영), 少微山人(소미산인)이다. 시호. 文愍(문민)이다.
효성의 귀감으로 후세에 알려지는 김극일(金克一, 1382~1456?)의
손자이며 집의를 지낸 金孟(김맹, 1410~1483)의 아들이며, 金宗直(김종직)의 제자이다.
[탁영 김일손 묘비]
생육신의 한사람인 이맹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밀양의 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의 문하에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金宏弼(김굉필). 鄭汝昌(정여창). 정여해. 姜渾(강혼). 남곤. 정광필 등과 사귀었다.
일찍이 스승으로 섬긴 김종직을 닮아
詞章(사장)에 능했고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였다.
[정부인 예안김씨 묘]
성종 17년(1486)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 春秋館(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李克墩(이극돈)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또한 세조 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弔義帝文(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弔義帝文(조의제문)은 그의 스승 김종직이 項羽(항우)가 초 懷王(회왕),
즉 義帝(의제)를 죽이고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은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었다.
[정부인 예안김씨 묘비]
이 조의제문과 기타 여러가지 사건이 빌미가 되어 후일
연산군 4년(1498)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戊午士禍(무오사화)로
김종직은 剖棺斬屍(부관참시) 당하였고, 權五福(권오복), 權景裕(권경유)
李穆(이목)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묘 앞 우측 문인석]
그는 세조의 꿈 때문에 어이없이 부관참시된 단종의 어머니인 顯德王后(현덕왕후)의 昭陵(소릉)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였고,
황보 인, 김종서 등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淑儀權氏(숙의권씨)의 노비와 토지를 權擥(권람)이 가로챘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동료들로부터도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정광필이나 남곤, 김굉필, 김전, 김안국 등은 그런 신랄한 지적을 한 그에게
되도록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충고하거나, 오히려 그를 나무라고 질책했다.
그의 직언을 비판한 정광필과 김안국, 남곤, 김전, 김굉필 등은
살아남았지만, 그의 직언에 동조했거나 긍정적이었던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대부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희생되었다.
[묘 앞 좌측 문인석]
戊午士禍(무오사화)로 죽임을 당한 濯纓(탁영) 김일손의 묘를 중종반정 후 이장할 때 남곤은 글을 지어
'公(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廟堂(묘당)의 그릇이었다.
疎章(소장)과 箚子(차자)의 문장이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인물은 시비하고 국사를 논함이 마치 靑天白日(청천백일) 같았다.
哀惜(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
공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다. 불행한 때를 만나 禍(화)를 입고 죽었구나'
하고 애석해 하면서 '輓詩(만시)'를 지었다.
[김씨 묘 전경]
탁영선생 묘와 부모의 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던 김씨 묘
탁영선생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관계되는 분의 묘소 같아 함께 담아 보았습니다.
[탁영선생의 부모 金孟(김맹) 묘소 전경]
金孟(김맹) 태종 10(1410)~성종 14(148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子進(자진). 호는 南溪(남계)
아버지는 節孝(절효) 金克一(김극일)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윤 이간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세종 23년(14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 김천도찰방. 예조좌랑이 되었다.
[贈吏曹參判南溪金公之墓(증이조참판남계김공지묘)]
[金孟(김맹) 묘]
밤에 龍馬(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駿孫(준손), 驥孫(기손), 馹孫(일손)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金氏三珠(김씨삼주)'로 일컬어졌다.
[金孟(김맹) 묘비]
[부인 이씨 묘]
[부인 이씨 묘비]
[묘 앞 좌측 문인석]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文愍(문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증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木川(목천)의 道東書院(도동서원),
경북 청도의 紫溪書院(자계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濯纓文集(탁영문집)'이 있다.
위 도동서원과 자계서원을 클릭하시면 들려보실 수 있답니다.
혹 못 보셨거나, 들려보시고 싶으시다면 클릭하셔서 보셔요.
탁영 김일손 묘역 답사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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