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아버지 許曄(허엽) 묘

2015. 8. 21. 05:59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2리


[許曄(허엽) 묘역 전경]

許曄(허엽, 1517~1580) 조선중기의 문신,
성리학자로, 자 太輝(태휘), 호 草堂(초당), 본관 陽川(양천)이며,
강릉초당의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들어 초당두부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시호 文簡(문간).
 
그의 슬하에 許筬(허성), 許篈(허봉), 許筠(허균), 許蘭雪軒(허난설헌)
4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시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許蘭雪軒(허난설헌)은
규수시인으로 이름이 나서 황진이, 신사임당과 함께 삼대여류로 꼽혀왔다.



[묘 앞 좌측 문인석]

일찍부터 영리하고 조숙하였으며 노수신에 의하면 7, 8세에 孝友(효우)가 남달랐고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번거로이 勸督(권독)하지 않아도 월등히 진취하였다 한다.

어려서 羅湜(나식)에게 소학, 근사록 등을 배웠고, 뒤이어 晦齋(회재) 李彦迪(이언적)을

찾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신 이언적이 인종에게 勸講(권강)한 心經附註(심경부주)를 구해 읽었다.

이어 鎭川(진천) 李畬(이여)가 수학에 정통하고 주역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여를 찾아가 그에게 수학과 주역을 배웠다.



[묘앞 우측 문인석]

뒤에 송도를 찾아가 화담 서경덕에게 사사하였는데, 서경덕은 그를 특별히 총애하여

만년에 병이 위중할 적에 '原理氣(원리기)' 등의 여섯 편을 구두로 그에게 읊어 주었다.
그는 서경덕의 구술을 일일이 받아 기록했다 한다.

1540년(중종 35년) 서경덕의 문하에 있을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46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서경덕 사후 안동 도산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잠시 수학하였다.



[ 許曄(허엽) 묘]

경기도 시흥군에 안장되었다.
묘비문은 노수신이 지었고,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신도비문은 南應雲(남응운)이 썼다.

도산서원의 건립을 지원하였고 鄕約(향약)의 실시를 건의하는 등 주자학의 보급에 힘쓰기도 했다.




[묘비]

그의 아들 허균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에 그 시신을 수습할 수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이유였을까?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묘비가 두 동강 났던 흔적이 역력하다.

일찍이 김정국이 엮은 '경민편'을 보충하기도 하였으며 '삼강오륜행실'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청백리에 등록되었고, 개성 花谷書院(화곡서원)에 제향되었다.

1968년 묘소가 시흥에서 용인군 원삼면 맹리의 가족묘소로 이장하였다.
蛟山(교산) 許筠(허균)의 묘 뒤 둔덕에 자리하고 있다.




[정부인 강릉김씨 묘비(허봉,허균,허초희 모친)]

하긴 그 시대에 역적으로 몰리게 되면 그 화가 이미 죽은 가족들에게까지 미쳤다.

묘에 있는 비석을 파손하거나 또는 파묘를 하고 심지어는 무덤 속에 있는 시신을 꺼내 목을 치는

'부관참시'까지 하였다. 하니, 묘비가 두동강 난것으로 끝난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