靜一堂(정일당) 姜氏(강씨) 祠堂(사당)

2015. 9. 7. 06:09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정일당 강씨 사당과 묘소 가는 길]

 

이렇게 넓게 잘 닦아 놓은 길이지만, 아래쪽에서부터 더 이상 차량으로 이동할 수 없게 쇠줄로 막아 놓았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해 놓고 약 800m만 가면 있다는 사당과 묘소로 향했다.

 

 

[사당입구 전경]

 

차량으로 이동하면, 금방일 거리를 한참을 걸어서 올라야 했지만,
정일당 강씨의 사당과 묘소를 답사하고 가겠다는 마음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지요.
여긴가 저긴가 기웃기웃되며, 오르는 길도 흐뭇하였다.

드디어 사당이 보이기 시작...

 

 

[추모비와 안내판 사당 전경]

 

靜一堂(정일당) 姜氏(강씨, 177~1832)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본관 晉州(진주). 호 靜一堂(정일당). 충청북도 제천 출신
아버지는 在洙(재수)이며, 어머니는 安東權氏(안동권씨)로 瑞應(서응)의 딸이다.

 

아명은 至德(지덕)이며,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충주의 선비 尹光演(윤광연)과 혼인하였다.
이때 그의 남편은 불과 14세였다.

 

 

[안내판 글 내용]

 

[追慕碑(추모비)]

 

碑(비)에는 坦齋尹光演(탄재윤광연)과 아내 靜一堂姜氏(정일당강씨) 追慕碑(추모비)라 적혀 있다.

尹光演(윤광연) 본관 坡平(파평), 자 明直(명직), 호 坦齋(탄재), 우암 宋時烈(송시열)의 6세손인 剛齋(강재) 宋穉圭(송치규)의 제자이다.

 

그녀의 친가였던 진주강씨는 10대조 姜希孟(강희맹) 이래 시와 문장으로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寒水齋(한수재) 權尙夏(권상하)의 동생인 權尙明(권상명)의 현손이다.


그녀는 외가의 친척들과 교유가 많았으므로 외가쪽의 성리학적 학풍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한다.

 

 

[靜一堂(정일당) 현판]

 

[靜一堂(정일당)]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翼工系(익공계) 맞배지붕 구조이며, 측면에 風壁(풍벽)을 갖추고 있다.
사당 중앙에는 '靜一堂(정일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사당 안에는 정일당 강씨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사당 입구에는 좌우로 안내표지판과 정일당 강씨 추모비가 세워져 있을 뿐 별도의 담장이나 대문이 없다.

 

 

[우측에서 담은 靜一堂(정일당) 전경]

 

정일당 강씨의 친가와 시가는 다 같이 벼슬을 하던 명문의 후손이었지만,
증조부 이후에는 벼슬을 하지 못하여 가세가 기울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하였다.

남편 윤광연은 젊은 시절에 학문을 힘쓰지 않고 생계를 위하여 상업활동을 하다가 적은 재산마저 탕진하였다.

 

고향에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그들은 서울 근처로 올라와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과천에서 남의 오두막에 살았는데, 어느 해에는 흉년이 들어 3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다.
자녀를 9명이나 낳았으나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죽고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였다.

 

 

[좌측에서 담은 靜一堂(정일당) 전경]


그녀는 바느질을 하면서 남편 윤광연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녀는 재능이 탁월한데다가 남편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으므로
학업의 성취가 항상 남편보다 앞서 나갔고 남편의 학업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윤광연은 강재 송치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히며 많은 노론 명사들과 교유하였고,

惠岡(혜강) 崔漢綺(최한기)와도 일정한 교분이 있었다.


그는 부지런히 공부하였으나 큰 학자가 되지 못하였고 벼슬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일당은 그에게 벼슬을 단념시키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도록 권하였다.

윤광연은 부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녀의 격려와 충고에 의하여 학문과 인격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였다.


 

[묘역 안내팻말]

 

0.8km라는 숫자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곳까지 와서 묘소에 들려보지 않고 되돌아가기가 서운하여, 묘소로 향하는 오솔길로 걸음을 재촉하였지요.

 

시문. 서화에 능하고 성리학. 經術(경술)에도 밝았다.
글씨는 黃運祚(황운조)의 필법을 이어받아 楷書(해서)를 잘 썼고 시에는 道家(도가)의 기풍이 담겨 있다.

 

[묘소로 가는 오솔길]

정일당은 가난했던 외에도 몸이 허약하여 평생을 고생하였다.
1822년 7월에는 큰 병으로 사흘 동안 기절한 후에 소생하였는데,
이때 평생 저술한 '答問編(답문편)', '言行錄(언행록)' 등 수십 권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처럼 만년에 병으로 고생하던 끝에 순조 32년(1832), 향년 만 61세에 돌아가셨다.
광주군 대왕면 둔퇴리 청계산 동쪽(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詩作(시작)으로 '夜坐(야좌)', '除夕感(제석감)',  '聽秋蟬(청추선)',
'敬次尊姑只一堂韻(경차존고지일당운)' 등 31수가 전한다.

특히 정일당은 시어머니 지일당 전씨와 시로써 대화를 주고 받은
일화로도 유명하며 저서에 '靜一堂遺稿(정일당 유고)'가 전해온다.

 

 

[인터넷에서 모셔온 정일당 강씨 묘(향토유적 제1호)]

 

지독한 가난과 자식들의 죽음 어느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며 살으셨다 한다.

조선시대의 최고 커플로 회자되는 윤광연과 정일당 강씨는 물질에 너무 치우치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교훈을 해주는듯도 하다.

 

묘역은 오르고 또 올랐지만, 숨이 턱에 닿을 무렵 거의 다 온 지점에서...두런두런 장정들의 얘기하는 목소리가 들려 옳다구나 하고

물어볼까하다가, 깊고 깊은 산중 와락 무섭증이(세상에 워낙 험하여....) 총총 뒤돌아 내려왔습니다.....ㅠ.ㅠ

 

[사당 앞쪽 연못]

 

비록 묘소는 들리지 못하였지만, 그분이 쓴 詩(시) 서너편을 소개합니다.

 

聽秋蟬(청추선)
가을 매미 소리

 

萬木迎秋氣(만목영추기)
어느덧 나무마다 가을빛인데
蟬聲亂夕陽(선성란석양)
석양에 어지러운 매미 소리들

 

沈吟感物性(침음감물성)
제철이 다하는 게 슬퍼서인가
林下獨彷徨(임하독방황)
쓸쓸한 숲 속을 혼자 헤맸네

 

 

夜座(야좌)
밤에 홀로 앉아


夜久群動息(야구군동식)
밤은 깊어 고요하고
庭空皓月明(정공호월명)
빈 뜰에 달 밝은데

 

方寸凊如洗(방촌청여세)
씻은 듯 맑은 마음 탁트여 활짝 개니
豁然見性情(활연견성정)
참 나의본래 모습을 속속들이 보리라


 

除夕感吟(제석감음)
섣달 그믐날의 느낌을 읊다.

 

無爲虛送好光陰(무위허송호광음)
좋은 세월 할일 없이 다 보내고
五十一年明日是(오십일년명일시)
내일이면 쉰 한살이라네.

 

中宵悲歎將何益(중소비탄장하익)
한 밤에 슬피 탄식한들 무슨 이로움 있으리오
自向餘年修厥己(지향여년수궐기)
스스로 남은 해에는 몸을 수양하며 살리라.

 


시어머니 지일당의 韻(운)에 次韻(차운)한 글
敬次尊姑只一堂韻(경차존고지일당운)이 있다.

 

春來花正盛(춘래화정성)
봄마다 꽃은 피고 사람은 늙어가고
歲去人漸老(세거인점노)
애닯다 한숨 쉰들 가는 세월 어이하리

 

歎息將何爲(환식장하위)
이왕에 그럴 바에야
只要一善道(지요일선도)
착한 일이나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