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1. 07:01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29-5
경기도 기념물 제 90호
[허난설헌 안내표석]
이곳도 찾기가 힘이 들었다.
네비양이 가르켜 주는 주소의 목적지는 고속도로위 역시 말 물음으로 물어 물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허난설헌 지묘라 새겨진 안내석이 반갑다.
[안내석 글 내용]
[재실과 안내판과 허난설헌 묘 전경]
안내석이 인도해 주는 대로 아늑한 길을 따라 오르니, 우측으로 주차장이 보여
우선 주차를 하고 돌아보니, 허난설헌의 묘가 재실과 함께 높다른 둔덕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안내판 글 내용]
[묘역 옆 재실 전경]
[정면에서 담은 묘역 전경]
난설헌 무덤은 안동 김씨 묘역에 있다.
3단으로 되어 있는데 남편과는 죽어서도 따로 떨어져 있다.
김성립은 후처로 들어온 남양 홍씨와 합장되어 있다.
그나마 이렇게 넓은 터를 배정받은 건 시인으로서 난설헌의 명성 때문일 것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난설헌을 만나기 위해 온다.
평범했던 남자 김성립은 총명한 아내를 둔 덕분에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
[許蘭雪軒(허난설헌) 墓(묘)와 묘비]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淸州韓氏(청주한씨)에게서 許筬)(허성)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다시 강릉김씨 金光轍(김광철)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許蘭雪軒(허난설헌, 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楚姬(초희), 다른 이름은 玉惠(옥혜)이다.
蘭雪軒(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許蘭雪軒(허난설헌), 許蘭雪齋(허난설재), 蘭雪軒(난설헌) 許氏(허씨)라 불리었으며, 자 景樊(경번)이며, 본관 陽川(양천)이다.
15세때가지 자신의 재능을 펼치며 행복했던 난설헌은 그 후 12년간은 조선시대의 여인으로서 가장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여인
[墓碑(묘비)]
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
이숭년이 지은 비문이 새겨진 묘비도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許蘭雪軒(허난설헌) 墓(묘)]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뛰어났으며,
8살 때 廣寒殿白玉樓上梁文(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상량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한다.
어영차, 북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북해 아득하고 아득해 북극성에 젖어 드는데,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이 높이 치솟아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이 어둑하다. 어영차. 위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1577년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安東金氏(안동김씨) 金誠立(김성립)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路柳墻花(노류장화)의 풍류를 즐겼다.
남편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詩(시)를 한 구절 써보냈다.
?君自是無心者(낭군자시무심자),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同接何人縱半間(동접하인종반간)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또 다른 일화로는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接(접)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옛날의 接(접)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오늘의 接(접)은 재주(才)가 없다.
이 편지에서 오늘의 接(접)에는 才(재)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妾(첩,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을 조롱했던 것이다.
[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선조 13년(1580)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고 말았다.
詩(시) 재주와 문명은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시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받았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되었다.
[두 자녀의 묘]
자녀의 쌍분은 난설헌묘에서 20m 가량 떨어져 있다.
원래 쌍분은 어머니의 가슴에 폭 안긴 듯 허난설헌묘 바로 앞에 있었으나, 이장하면서 옆으로 비껴난 것이라 한다.
시어머니의 냉대와 남편의 무관심속에서도 그녀를 지켜주었던 두 아이는 너무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녀를 더욱 고통속에 밀어 넣었으나 지금은 남편을 대신하여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있어 다행스러워 보인다.
[허봉이 쓴 묘비 글 내용]
그녀의 둘째 오빠이자 아이들의 외삼촌인 허봉의 글이 묘비에 새겨져있다.
[두 자녀 묘에서 담은 허난설헌 묘 전경]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금년내삼구지수)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금일상타홍)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청난의채난)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蘭雪軒(난설헌) 詩碑(시비)]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詩碑(시비)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哭子詩(곡자시)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詩碑(시비) 글 내용]
[뒤쪽에서 담은 시비 전경]
夢遊廣桑山(몽유광산산)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붉은 빛 다 가신채
서리 찬 달 아래에 차갑기만 해라....라는 詩句(시구)는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고 27세의 천재여류시인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詩碑(시비) 글 내용]
허난설헌의 묘 뒤쪽 돌계단을 오르면
남편 김성립와 시동생 부부의 합장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광주재실 전경]
'사람은 가도 문장은 남는다.'
하지만 난설헌은 사람과 함께 그 문장도 함께 사라지기를 원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이 쓴 시를 불살라 줄 것을 유언하고 훌훌 털고서 떠나갔다.
난설헌의 뜻과는 달리, 우리는 200여 수가 넘는 난설헌 시를 애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누이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했던 아우 허균의 노력 덕이었다.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 있던 詩(시)와 자기가 외고 있던 시문 200여 수를 모아 '난설헌집'을 엮어 두었다가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사신에게 시를 전해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시집'이 간행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렇게 난설헌의 시가 중국에 처음 소개된 뒤, 중국의 많은 시인들은 그의 시를 베껴 쓰며 애송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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