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察使(관찰사) 李禮孫(이예손) 묘

2015. 9. 18. 06:03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169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

 

[안내팻말]

 

[묘 오르는 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廣州(광주), 자는 季胤(계윤)이다.
參議(참의) 李之直(이지직)의 아들로 세종 16년(1434) 謁聖文科(알성문과)에 급제하여
司諫院 右正言(사간원 우정언)에 제수되었고,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쳤다.


 

[묘 오르는 길 2]

외조부는 李元普(이원보), 처부는 朴曙(박서), 형은 李長孫(이장손),
李仁孫(이인손)이며, 아들은 참판 李克基(이극기), 좌통례 李克堅(이극견)이다. 

 

[안내석과 묘역 전경]

내금위사인으로 출발하여 사간원우정언, 사간원좌정에 임명되었다.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으로서 金何(김하)가 간음한 사실을 탄핵하였다.
세종 26년(1444)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수원부사에 임명되었다.

 

 

[觀察使公(諱 禮孫) 行蹟碑[관찰사공(휘 예손) 행적비]

 

[철조망 밖에서 담은 묘 입구 쪽 전경]

 

묘을 빙 둘러 철조망으로 막아놓았네요.
행여나 하고 자물통을 눈여겨 보았지만, 굳게 닫혀 있었다.
철조망 밖에서 담으려니 답답하긴 하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 없지요.

철조망으로 둘러쌓인 묘 철조망 밖에서
묘를 빙 둘러 한바퀴 돌아가며 담아 왔습니다.


 

[우측에서 담은 묘 전경]

수원부사로 근무하던 중에 명나라 사신을
벽제관에서 잘 응대하여 외관승진 논의가 있기도 하였다.
司諫院右司諫大夫(사간원우사간대부)로 임명되었으며, 여러관직을 거쳐
세조 즉위에 협조한 공로로 佐翼原從功臣(좌익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철조망 담 너머로 담은 묘 전경]

세조 4년(1458)에는 형조참의를 지냈다.
管押使(관압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다가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사람들이 모두 哀悼(애도)하였으며, 조정에서는 賻儀(부의)를 내려 주었다.

 

[철조망과 묘 전경]

史評(사평)에 의하면 성질이 慷慨(강개)하고 方直(방직)하여
구차하게 남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에 廉介(염개)로 불렸다고 한다.

 

[뒤쪽에서 담은 묘 전경]

묘는 사각형의 봉분으로 貞夫人(정부인) 密陽朴氏(밀양박씨)와 합장분이다.
봉분의 아래를 護石(호석)으로 둘렀으며 뒤로 龍尾(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다. 

봉문 앞쪽으로 魂遊石(혼유석), 床石(상석), 香爐石(향로석), 長明燈(장명등)
상석의 왼쪽과 오른쪽에 文人石(문인석)과 望柱石(망주석)이 한 쌍씩 있다. 

문인석은 幞頭(복두)를 썼고 두 손은 笏(홀)을 마주잡았는데 표면이 마모되어 있다.

 

[좀더 가까이 담아 본 묘 전경]

墓表(묘표)는 봉분의 왼쪽에 있으며 1984년 건립되었고
비문은 19대손 李採鎭(이채진)이 짓고 쓴 것으로 건립연대는 1984년이다.
비록 묘표는 근래 세운 것이지만 관석의 조각이 세련되고 우수하다. 

碑座(비좌), 碑身(비신), 冠石(관석)을 갖추었고 총높이는 252cm이다.

 

[묘 전경]

오른쪽에는 증손 李英賢(이영현)의 묘소가 활개를 맞댄 채 동서로 나란히 있다.
봉분의 하부에는 호석을 둘러 놓았으며 후미에는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다. 

묘소에는 봉분 중앙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과 상석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을 한 쌍씩 배치하였다.

 

[철조망 좌측에서 담은 묘 전경] 

이 중 문인석은 복두(?頭)로 얼굴은 길쭉한 편인데 눈과 코가 크며 홀을 마주잡은 두 손은 왜소하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바람과 비로 인해 신체의 표면이 마모된 상태라 한다.

 

[한바퀴 휘돌아 좌측 귀퉁이에서 담은 묘 전경]

비신에는 앞면에 세로 2줄로
'觀察使廣州李公禮孫墓 貞夫人密陽朴氏?'(관찰사광주이공예손묘 정부인밀양박씨부)의

비문과 후면에 공의 약력을 새겨 놓았다.

 

[묘 입구쪽에서 담은 앞 전경]

이예손의 묘는 광주이씨 대종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하대원동 현대아파트와 대하초등학교 맞은편의 구릉 사면에 남향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