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原君(광원군) 李克墩(이극돈) 墓(묘)

2015. 10. 10. 06:19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
성남시향토문화유적 제7호

 

[도로변 광주이씨 묘역 안내팻말 전경]

 

[李克墩(이극돈) 神道碑(신도비)]

 

[神道碑(신도비) 정면 사진]

 

[광원군 이극돈 행적비와 묘로 오르는 계단 전경]

긴 계단을 오르면 곧장 광원군 이극돈의 묘가 보인다.

 

 

[광원군 이극돈 행적비]

廣原君(광원군) 諱(휘) 克墩(극돈) 行蹟碑(행적비)
성남시향토문화유적 제7호 라 새겨져 있다.

 

 

[광원군 이극돈 묘 전경]

 

조선 전기의 문신 李克墩(이극돈, 1435년 ~ 1503)
본관 廣州(광주), 자 士高(사고), 호 四峯(사봉)이다.

 

우의정 李仁孫(이인손)의 넷째 아들로 세조 3년(1457)
署令(서령)으로서 親試文科(친시문과)에 丁科(정과) 급제하였다.

 

 

[좌측에서 담은 李克墩(이극돈) 묘]

 

1471년 성종 추대에 가담하여
佐理功臣(좌리공신) 4등으로 廣遠君(광원군)에 봉해졌다.

 

수차례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종 18년(1487)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후 요직을 거치다가 숭정대부로 올라 좌찬성과 세자우빈객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남향하여 배 정경부인 安東權氏(안동권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李克墩(이극돈) 묘]

 

1485년에는 徐居正(서거정) 등과 '東國通鑑(동국통감)'을 편찬하였다.

 

典禮(전례)에 밝았으며, 勳舊派(훈구파)의 거물로서
성종 이후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와의 반목이 심하였다.

 

 

[구 묘표]

 

[신 묘표]

 

이극돈의 묘표는 봉분 중앙에
백색 화강암제의 비좌와 비신 및 화관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 앞면에는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순성좌리공신
봉광원군증시익평공광주이극돈지묘 정경부인안동권씨부좌'라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15대손 李昌來(이창래)가 짓고, 14대손 李永輝(이영휘)가 썼다.

 

 

[우측에서 담은 李克墩(이극돈) 묘]

 

實錄廳堂上官(실록청당상관)이 되어'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림파 金馹孫(김일손)이 스승인 金宗直(김종직)의 '조의제문'
훈구파의 비위 사실을 史草(사초)에 올린 것을 발견하고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초패왕 항우에 빗대어 비방한 것이라고 柳子光(유자광)과 함께
'연산군'에게 고하여, 戊午士禍(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

 

幞頭(복두)의 문인석은 큰 눈, 큰 코에
비해 인중은 희미하고 입은 상대적으로 작다.

 

턱에 턱수염의 표현이 특이하고 笏(홀)을
마주잡은 손에는 굵은 손가락의 표현이 있다.
5단의 옷 주름과 관복은 길게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연산군 4년(1498) 戊午士禍(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들을 제거한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알려져 있다.

 

사화가 있은 후 史草(사초) 내용을 곧 왕께 보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漁世謙(어세겸)과 같이 국문을 받고 北靑(북청)에 유배,
파직당하였다가 다시 廣遠君(광원군) 에 봉해졌다.

 

 

[李克墩(이극돈) 묘 앞쪽에서 담은 후손의 묘 전경]

[맨 아랫쪽 묘아래에서 올려다 본 이극돈 묘 전경]

 

그 뒤 연산군 7년(1501)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69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諡號(시호)는 翼平(익평)이나, 뒤에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