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 이집선생 사당과 묘

2015. 11. 23. 06:32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7-1 일대
경기도 기념물 제219호

 

 

[묘역 입구쪽에 서 있는 선생의 신도비]

 

[사당과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遁和門(둔화문) 현판]

 

[사당 삼문 遁和門(둔화문) 전경]

 

사당 삼문인 遁和門(둔화문)은 닫혀 있기에 우선 안내판의
안내글을 담고는 옆쪽 묘역으로 오르는 길이 보여 묘역으로 올랐다.

 

 

[사당 우측 옆쪽 묘역 오르는 길]

 

사당 삼문인 遁和門(둔화문)은 닫혀 있기에 우선 안내판의
안내글을 담고는 옆쪽 묘역으로 오르는 길이 보여 그곳으로 갔더니,

참배객 외에는 출입금지란 팻말이 붙어 있네요.


답사도 참배하려 들리는 거나 마찬가지니 묘역으로 향했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에 담은 사당 옆 전경]

 

李集(이집, 1327~1387)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 廣州(광주), 초명. 元齡(원령), 자. 成老(성노), 浩然(호연),
호. 墨岩子(묵암자), 遁村(둔촌)이다.

李唐(이당)의 아들로 鄭夢周(정몽주), 李穡(이색), 李崇仁(이숭인) 등과 교유했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

 

광주이씨의 中始祖(중시조) 遁村(둔촌) 李 集(이 집)
우선 맨 위쪽에 모신 遁村(둔촌) 李 集(이 집) 선생의 묘역부터

들려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中始祖(중시조) : 쇠퇴한 가문을 일으킨 조상을 말한다.

 

 

[묘비와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묘비와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

 

[묘비]

 

[묘비 뒷면]

 

[좌측에서 담은 둔촌 이집 부부 합장 묘역 전경]

 

충목왕 3년(1347) 과거에 급제하였고,
공민왕 17년(1368) 신돈의 비행을 비판하고
장차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해 아버지를 업고 도망하여
永川(영천)에서 은거하였다.

 

 

[우측에서 담은 둔촌 이집 부부 합장 묘역 전경]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역모로 주살된 후,
옛집인 松京(송경)의 龍首山(수양산) 아래 玄化里(현화리)에 돌아왔다.

 

이어 判典校寺事(판전교시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川寧縣(천령현)에서 독서와 농경으로 세월을 보냈다.

 

 

[정면에서 담은 묘역 전경]


이때 詩篇新粒(시편신립)에 대한
질문서를 보내 당시의 文士(문사)들을 경탄케 하였다.


현종 10년(1669)에 건립한 광주(강동구 암사동)의
龜岩書院(구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유고로 '遁村遺稿(둔촌유고)'가 있다.

 

 

[둔촌 이집 부부 합장 묘]


둔촌 이집 묘역은 부인 정화택주 영주황씨와의 원형 합장묘이다.


묘역에는 혼유석, 상석, 4각 향로석, 장명등,
4각 망주석, 문인석 등 다수의 석물 외에 차양석 4개와
2단의 계체석 및 봉분 좌우측에 신구 묘표가 각 1기씩 서향하고 있다.

 

 

[묘비]

 

[좌측 묘앞 문인석과 망두석]

 

[우측 묘앞 문인석과 망두석]

 

[산신석]

 

[묘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선생의 묘 바로 아래쪽에는 사인공 이장손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사인공 이장손 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사인공 이장손은 이지직선생의 장남으로
長孫(장손)인 이장손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이 이장손... 장손이라 일부러 그렇게 지은것 같기도 하다 합니다.

 

 

[이장손의 묘에서 담은 묘역 전경]


뒤쪽에 할아버지인 遁村(둔촌) 李集(이집) 墓域(묘역)과
나란히 아랫쪽에 자리하고 있는 전경이 참으로 아늑하고 보기 좋았다.


자는 孟胤(맹윤) 둔촌 이집의 손자이며, 탄촌 이지직의 맏아들이다.
태종 11년(1411) 문과에 급제하여 녹사를 거쳐 통정대부의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이 편수관을 지내다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뒤에 운곡서원에 배향되었다.

 

 

[구 묘비]

 

[신 묘비]

 

[앞쪽 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앞쪽 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이장손의 묘 아래에는 그의 아들 이극규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참의공 이극규의 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자는 公瑞(공서) 이집의 증손이며, 이지직의 손자
우의정 이인손의 조카이며, 의정부사인 이장손의 아들이다.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의 사촌이다.

 

[좌측에서 담은 참의공 이극규 묘 전경]


아버지 이장손의 묘아래쪽 약간 비스듬히 비켜선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성종 3년(1472) 춘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종 16년(1485) 지평으로 있으면서 4품 이상의 당하관에게
역마를 이용하게 하는 것은 역로의 조폐를 가져오므로 불가함을 주장하였고,
그의 사촌인 이극균이 병조판서가 되자 혐의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참의공 이극규 묘]


연산군 재위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군액의 폐단 재가녀 소생의 허통등을 주장하였다.
무오사화가 발생하자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은법률에 따라
논단해서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에 관직을 사퇴하고 해주의 수양산 아래에 은거하다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구 묘비]

 

[신 묘비]

 

[좌측 문인석과 망두석]

 

[우측 문인석과 망두석]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담은 입구쪽 전경]

 

[사당 전경]


사당 뒷쪽으로 난 길이 보이길래 내려가보았더니,
사당 옆으로 관리실인듯 보이는 건물의 문이 열려 있기에
안으로 들어가며, 인기척을 내 보았지만,...
한참을 망서리다 조심스레 들어가니, 할머님 한 분이 나오셨다.


사당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며 여쭈었더니,
사당과 통하는 일각문을 가르켜주시기에 그곳을 통해 안으로...

 

 

[일각문쪽에서 담은 사당]

 

[追慕齋(추모재) 현판]

 

[우측에서 담은 사당 追慕齋(추모재)]

 

[안쪽에서 담은 닫혀 있던 사당 삼문 전경]

 

[관리사 건물]


앞쪽에 보이는 건물의 우측 부분에 보이는
문으로 들어와서 미안함과 죄송함에 서둘러 사진을 담고
되돌아 나오며 감사함의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