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석 묘역

2015. 11. 26. 06:22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37
강원도 기념물 제75호

 

 

[주차장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사당으로 가는 길]

 

[묘역으로 오르는 탐방로]

 

묘역으로 오르는 1번 탐방로 길을 택하여 걸음을 옮겼다.

산책길 양쪽으로 세워놓은 운곡 원천석 선생과 관계된 그림과 안내글을 읽으며...

 

 

[운곡 원천석 선생 묘역 안내도]

 

[탐방로 길 전경]

 

[탐방로 길 전경 2]

 

양쪽에 세워놓은 운곡 선생과 관계된

사연들은 따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탐방로 길 전경 3]

 

[묘역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아래쪽에서 담은 운곡 선생의 묘역 전경]

 

본관은 원주(原州), 자 子正(자정), 호 耘谷(운곡)

原州(원주) 元氏(원씨)의 中始祖(중시조)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隱士(은사)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靑丘永言(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있는 時調(시조)

 

興亡(흥망)이 有數(유수)하니 滿月臺(만월대)도 秋草(추초)로다
五百年(오백년) 王業(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쳤으니
夕陽(석양)에 지나는 客(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라는 '懷古歌(회고가)'의 作者(작자)로 유명하다.

 

 

[묘역 오르는 길 옆 야생화]

 

야트막한 언덕과 길에는 들꽃들이 환하게 우릴 반겨주었다.

난 들꽃이 핀 길을 따라 내려오며 주위 경관에 마음을 빼앗겼다.

 

 

[묘역이 있는 둔덕 전경]

 

선생은 충숙왕 17년(1330) 開城(개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고, 춘천향교에서 공부하였는데 학문이 뛰어났다.


27세에 國子監(국자감) 進士試(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고려말의

정치적 어지러움을 보고 雉岳山(치악산)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셨고,
李穡(이색) 鄭道傳(정도전) 등과 交遊(교유)하면서 時局(시국)을 개탄하였다.


만년에는 儒學者(유학자)이면서도 佛敎(불교)와 道敎(도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三敎一致論(삼교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운곡 원천석 선생 묘역 전경]

 

풍수를 좋아하는 옆지기 따라 여러곳을 다녀보았지만,

墓地(묘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얕으막한 언덕 위에 소박한 봉분이 작으만하게 봉긋 솟아있었다.

 

너무 커서 부담스럽지도 않았으며, 상석과 비석등으로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지만,

무지한 나의 눈으로도 아! 이게 바로 명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무학대사가 정해주신 터로 선생은 후손을 위해 아래 지점인

'蜂腰穴(봉요혈)' 로 정하였다고 하는 천하의 몇 안되는 명당이라고 한다.

 

 

[운곡 원천석 선생 묘]

 

선생은 일찍이 李芳遠(이방원)을 가르친 바 있었는데,

이방원이 조선왕조 3대 왕으로 즉위하여 수차 출사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치악산 속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30여 년 동안 절의를 지키며 초근목피로 생활하였다.

선생은 위대한 스승으로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懷古歌(회고가)와 耘谷時史(운곡시사)가 전해진다.

 

특히 운곡은 말년에 저술한 야사 6권을 자손에게 보이며

"이 책을 가묘에 갖춰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하였지만,

증손대에 이르러 조선 왕조를 거스르는 부분이 많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묘에서 담은 아래쪽 신도비 전경]

 

신도비는 묘가 있는 언덕 아래쪽에 있었다.

신도비에서 쳐다본 선생의 묘...그 옆으로 보이는 돌들이 명당들에 나타나는 돌이라한다.

옆지기의 설명에 따라 다시 쳐다보니..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나의 눈에도...

 

청구영언, 동가선에 실린 선생의 시조 한수를 올려봅니다.

 

눈 마자 휘어진 대를 뉘라셔 굽다탄고.
구블 節(절)이면 눈 속에 프를소냐.
아마도 歲寒高節(세한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현대어 풀이]

눈을 맞아 휘어진 대나무를 보고 누가 굽었다고 하는가
굽혀질 절개라면 차가운 눈 속에서 푸르게 서 있겠는가 
아마도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높은 절개는 너뿐인가 생각하노라.

두 왕조를 섬길 수 없음을 지조있게 노래한  작품이라 한다.

 

 

[신도비]

 

[묘와 신도비 전경]

 

정도전이 치악산의 원천석을 찾아와 읊은 시 한 수가 전해진다.

때는 공민왕 9년인 1360년. 원천석의 산중 생활 경치를 짐작케 하는 시편이다.

 

同年(동년)인 원군이 원주에 숨었으니

다니는 길 험하고 산골도 깊어라

멀리서 온 친구 말을 멈추니

겨울바람 쓸쓸하고 날은 저물었네

그리던 나머지라 흔연히 웃고 나서

통술 앞에 다시 마음을 털어 내니

나는 노래 부르고 그대는 춤추네

이 세상의 영욕을 이미 잊었네.

 

여기에 화답한 원천석의 답시는...

 

그대와 同榜(동방)한 지 몇몇 해인가

사귄 도리 새삼 깊다 얕다 할 것 없네

제각기 일에 끌려 두 곳에 있지만

사람 만나면 상세히 안부를 물었는데

오늘의 뜻밖의 걸음 하늘이 시킴인가

마시고 또 웃고 세세히 얘기하네

부디 그대는 돌아갈 길 재촉 마시라

우리의 이 뜻 자중하고 어렵게 여겨야 하리.

 

 

[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선생이 저술한 운곡시사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데,
고려왕조를 재건하려는 입장에서 선생은 왕조교체보다는 제도개선에 치중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또한 지방사회에서 지방관은 형정(刑政)을 너그럽게 집행하고 인사도 公道(공도)에 맞게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삶에 대해 미수 許穆(허목)은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고,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여

백대의 스승이 되었다." 고 표현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정신은 우리고장 원주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원의 얼, 민족의 얼로 승화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다.


 

[선생의 묘 앞쪽 끝머리 부분에 있는 묘]

 

누구의 묘이며, 무슨 이유로

이곳에 안장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아마도 후손의 묘일듯....

 

 

[묘역 답사를 마치고 사당으로 가는 작은 다리]

 

[운곡 원천석 선생 사당]

 

[節義門(절의문) 현판]

 

[節義門(절의문)]

 

사당의 문은 닫혀 있고,

낮은 담너머로 우측과 좌측으로 이동하며 안쪽 사당 전경을 담았습니다.

 

 

[彰義祠(창의사) 현판]

 

[우측 담너머에서 담은 彰義祠(창의사) 전경]

 

[좌측 담너머에서 담은 彰義祠(창의사) 전경]

 

선생의 사당인 彰義祠(창의사) 지나 조금 더

길 따라 가면, 시비와 재실 모운재에 다다를 수 있다.

 

 

[운곡 원천석 선생 시비]

 

[懷古歌(회고가) 전문]

 

[慕耘齋(모운재) 현판]

 

[재실 慕耘齋(모운재) 전경]

 

[재실 앞쪽 연못의 수련]

 

[수련]

 

[재실 앞 연못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