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고 김병연(김삿갓) 묘

2015. 12. 1. 06:28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詩仙(시선) 金삿갓 遺蹟地(유적지) 碑(비)]

 

방랑시인 김삿갓 그의 이름은 炳淵(병연), 호는 蘭皐(난고)지만,

세상 사람들은 삿갓을 쓰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삿갓'이라고 불렀고,

어느만큼 인정을 나눈 사이에서는 性(성)인 '김'을 붙여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김삿갓'이란 뜻인 '金 笠(김 립)'으로 주로 표기했다.


조선조 순조 7년(1807) 3월에 한양성의 북서쪽인 경기도 양주군의

북한강이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인 1812년 12월에 서북 지방(평안도)의

청천강 북쪽 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 난'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 때 공교롭게도 그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선천군의

부사 겸 방어사로 있었으나, 그때 난군에게 맞서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난이 끝난 후 대역죄인 되어,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 때 다행히 할아버지를 뺀 나머지 가족은 목숨을 구했으나,

그는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가서 피해 살았다. 

 

 

[웹에서 모셔온 난고 김병연(김삿갓) 초상화] 

 

7세 때 가족이 다시 북한강변에 모여 살게 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와 동생이 죽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김병연만이 강원도 영월로 숨어들어 앞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20세 때의 봄에 영월 관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응시해서 장원을 했다.

그러나 그게 불행의 시초였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지은 죄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장원이 된 까닭이다.

 

난고는 조부가 지은 불충과 조상을 능멸한

자신의 죄상을 뼈저리게 아파하며 평생을 참회 속에 살았다.

 

 

[묘역가는 길 계곡 물]

 

방랑 시인 김삿갓의 유명한 일화.


언제나 그렇듯 갓쓴 선비네들은 정자에 앉아

옆에 계집을 꿰어차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있었다.

 

그때 한 삿갓을 쓴 행인이 그들의 틈에

끼더니 시를 쓸테니 술대접을 해 달라고 했다.

양반네들이 그 행인을 쫓으려고 했지만 한 양반이 호감을

느끼고는 선비들을 말려서 그 삿갓쓴 행인에게 시를 지어보게 했다.

 

그 행인은 정자에 앉자마자 과제를 내라 했다.

너무 당당한 모습에 당황한 양반들. 양반들은 꾀를 내어

자신들의 이름을 이용해 시를 지으라 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밝혔다.

 

'원 생원, 문 첨지, 서 진사, 조 석사'

 

그 말을 듣자 말자 대뜸 종이위에

글을 쓰놓고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길을 떠났다.

 

그 선비들이 삿갓쓴 나그네가 지은 시가

궁금해서 종이를 봤는데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日出猿生員 (일출원생원)

해뜨자 원숭이 들에 나오고
黃昏蚊添至 (황혼문첨지)

날 저무니 모기들 처마에 모여드네.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고양이 지나자 쥐는 모조리 죽고,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밤 들자 벼룩은 자리에 나와 쏘네.

 

원생원을 원숭이로. 문첨지를 모기로. 서진사를 로. 조석사는 벼룩으로...표현했다.

화가 나서 펄쩍 뛰었지만, 어쩌겠는가 벌써 김삿갓은 가고 없는걸....

 

 

[靜巖(정암) 朴泳國(박영국)선생 功績碑(공적비)]

 

[공적비 글 내용]

 

 

邑名開城何閉城(읍명개성하폐성)
고을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

山名松岳其無薪(산명송악기무신)
산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

 

그가 개성에 갔을 때에 어느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그 집주인은 문을 닫아걸고 땔감이 없어 못 재워준다고 했다. 이 때 지은 詩(시).

 

 

 

白髮汝非金進士(백발여비김진사)
허연 머리 너 김진사 아니더냐

我亦靑春如玉人(아역청춘여옥인)
나도 청춘에는 옥인과 같았더라

 

酒量漸大黃金盡(주량점대황금진)
주량은 점점 늘어 가는데 돈은 떨어지고

世事縡知白髮新(세사재지백발신)
세상 일 겨우 알만한데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샘물을 떠 마시며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읊은 詩(시).

 

 

 

自嘆(자탄)

스스로 탄식하다.


嗟乎天地間男兒(차호천지간남아)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知我平生者有誰(지아평생자유수)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萍水三千里浪跡(평수삼천리랑적)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琴書四十年虛詞(금서사십년허사)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靑雲難力致非願(청운난력치비원)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白髮惟公道不悲(백발유공도불비)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驚罷還鄕夢起坐(경파환향몽기좌)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三更越鳥聲南枝(삼경월조성남지)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越鳥(월조)는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청동 굴비 밥상 ]

 

[吉州明川(길주명천) 詩(시) 전문]

 

[향수 詩(시) 전문]

 

[묘역 가는 길]

 

[시선 난고선생 사적비]

 

[시선 난고선생 사적비 글 내용]

 

[시선김삿갓 선생 유적비 전경]

 

김삿갓. 그는 파격과 조롱, 기지와 야유를 바탕에 깐 해학과 풍자문학의 귀재였다.

촌철살인하는 기층 시와 난고의 생애를 소설화한 문학서적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으며, 한때는 라디오 방송에서 '김삿갓 북한방랑기'

방송돼 널리 회자됐고 가수 명국환이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 은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방랑 시인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은 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젖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千里行張付一柯(천리행장부일가)

천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떠돌다 보니

餘錢七葉尙云多(여전칠엽상운다)

남은 돈 엽전 일곱 푼이 아직도 많은 것이니

 

囊中戒爾深深在(낭중계이심심재)

그래도 너만은 주머니 속 깊이간직하려 했건만

山村訓長但知覓(야점사양견주하)

황혼에 술집 앞을 이르니 어이 할찌나

 

저녁 노을 붉게 물든 길을 가다가

주막을 보고 술생각이 간절하여 읊은 詩(시).

 

 

[환갑 시 조형물]

 

[환갑 전문]

 

천도는 하늘에만 있는 복숭아로서 이것을 먹으면 2천년을 산다는 전설이 있다.

 

 

[당집 전경]

 

김삿갓 집터는 묘소 앞의 '당집' 옆으로 난 계곡길로 접어들면,
제법 널찍하게 딲인 길은 찾아들기 쉬울것도 같지만, 먼저 왔을 때도

가보지 못하고 이번 길에도 비가 내려 들리지 못했다.

 

 

[당집]

 

[묘역 가는 돌계단과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묘소 아래 약수와 주변 전경]

 

[아랫쪽에서 담은 난고 김삿갓 묘역 전경]

 

김삿갓의 둘째 아들 익균이 아버지를 찾아

헤메다가 첫번째로 아버지를 만난 곳은 경북 안동에서였다.

 

몰라보게 장성한 아들을 상면하자 김삿갓은

무슨 까닭인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아들이 잠든 사이에 야반도주하고 말았다.

 

 

[좌측에서 담은 묘역 전경]

 

두 번째로 익균이 아버지를 만난 곳은 강원도 평강에서였다.
이번에는 아들에게 십리쯤 떨어진 곳으로 심부름을 시켜 놓고 그 사이에 또 도망쳐 버렸다.

 

세 번째로 익균이 아버지를 찾아 만난 곳은 전라도 익산군 여산에서였다.
김삿갓도 이번에는 할 수 없다는 듯 꼭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부자가 함께 길을 걷다가 수수밭머리에 와서

대변을보겠다고 밭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차마 용변하는 곳까지 따라가 지켜 볼 수는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익균이 삿갓 벗어놓은 쪽으로 가 보니
삿갓만을 벗어둔 채 그림자도 없이 또 사라지고 만 것이다.

 

 

[詩仙(시선) 蘭皐(난고) 金炳淵(김병연) 墓(묘)]

 

익균이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살아있는 아버지가 아닌 돌아가신 후의 아버지의 시신이였다.


1863년 계해, 철종 14년 3월 29일 전라도 화순 동복면 구암리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익균은 아버지께로 달려가서
시신이나마 자기 집 근처에 묻기 위하여 천릿길을 모시고 와서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록에 모셨다고 한다.

 

이때가 김삿갓의 나이 59세, 한 많고 기구한 시인의 한 생애가 이렇게 끝났다

 

 

[묘 앞에서 짝꿍 인증샷]

 

[묘역에서 내려다 본 전경]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북(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하동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발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