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足堂(삼족당) 金大有(김대유) 묘역

2015. 8. 7. 05:44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自隱門(자은문) 현판]

 

[재실 삼문 自隱門(자은문) 전경]

묘로 가기전 재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삼문은 닫혀 있고 재실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惟賢齋(유현재) 현판]

 

[담너머로 담은 惟賢齋(유현재)]

비록 삼문은 닫혀 있었지만,
약간 높은 담은 재실 전경은 담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惟賢齋(유현재) 현판은 줌으로 당겨 담을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묘로 가기전 다시 담아본 재실 전경]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삼족당 선생의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아랫쪽에서 담은 삼족당 묘역 전경]

金大有(김대유, 1479~1552)
본관은 김해. 자는 天佑(천우), 호는 三足堂(삼족당).
제학공 駿孫(준손)의 아들이며, 숙부는 馹孫(일손) 곧 濯纓(탁영)선생이다.

성종대왕 10년 기해(서기 1479년)년에 태어 나셨다.

 

[崇先篤志褒彰碑(숭선독지포창비) 전경]

묘역 아랫쪽  옹벽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碑(비)

 

[崇先篤志褒彰碑(숭선독지포창비)]

 

[묘역 오르는 계단 중간에서 담은 삼족당 묘역 전경]

앞쪽의 묘가 그의 아들 金成(김성) 부부의 묘이며,
뒤쪽에 보이는 묘가 삼족당 김대유와 부인 벽진이씨의 묘이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1년(1506)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조정에서 행실이 올바르고
학문에 뛰어난 자를 구할 때 천거되어 典牲署直長(전생서직장)을 지냈다.

 

 

[삼족당 김대유 묘]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한 뒤, 호조좌랑, 정언에 봉해졌으나
사양하고 칠원현감을 지내다가 1552(임자년) 운문산의 삼족당에서 별세하다.

 

 

[삼족당 김대유와 부인벽진이씨묘]

'나이 70을 지났으니 壽(수)가 이미 족했다.
患難(환난) 끝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薦科(천과)에 올라 臺省(대성)을
역임하였으며, 고을살이도 하였으니 영화도 족하다.
조석의 供饋(공궤)에 술과 고기가 끊임없으니 먹는 것도 부족하다 할 수 없다.'
하고, 堂(당) 이름을 三足(삼족)이라 하고 자기의 호로 하였다.

 

 

[삼족당 묘비]

 

[삼족당부인 벽진이씨 묘비]

 

[묘 좌측 앞 문인석과 선생의 묘비 전경]

 

[묘 우측 앞 문인석]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선생의 가문이 깊은 사화를 겪어서 여러 유고는
없어지고 문집이 세상에 전하나 오직 3절구의 시 뿐이다.

그 시에서 말하기를

조용한 연못의 물이 어리석은 연못으로 가고자 하니,
조용한 것은 곧 어리석은 것이다.
성스러운 장소가 전해져 남아 있으니, 이 산골짜기이구나.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말하는 것 보다 조용히 있는 것이다.

즉 산에서는 사냥하고 계곡에서는 물고기를 잡으니
고기잡이와 사냥은 짐승이나 물고기와 무관하다.
고기잡이 10년 동안 이곳을 내왕하여 물고기와 사냥한 것을 집으로 보냈다.
손으로 물을 치고 물속 달을 좇아가고자 하나, 물이 없으니 어찌할꼬.
비록 그렇다하나 또 어찌 상처받은 물이 푸르게 되고 희게 될 것인가.

 

[

 

[묘역에서 담은 재실 전경]

 

[묘역을 내려오며 담은 재실 전경]

三足堂(삼족당) 金大有(김대유)는 청도를 대표하는 명현이다.
三足臺(삼족대)는 김대유가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을 위해 청도에 지은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