藥泉(약천) 南九萬(남구만)선생 묘

2015. 8. 27. 05:59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 산1-5

용인시 향토유적 제5호

 

 

[묘역 가는 길]

 

南九萬(남구만, 1629~1711년) 조선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顯宗(현종)과 肅宗(숙종) 때의 문신으로,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숙종 때의 少論(소론)의 領袖(영수)로 자는 雲路(운로). 藥泉(약천), 美齋(미재). 본관은 宜寧(의령)이다.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오달제의 처조카이며 시호는 文忠(문충)이다.

그는 文詞(문사), 書畵(서화) 에도 뛰어났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藥泉集(약천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左相南智碑(좌상남지비).

開心寺(개심사). 楊花樓(양화루). 迎送樓(영송루) 등의 額字(액자)를 남기고 있다.

 

 

[정면에서 담은 신도비 전경]

 

묘 아래 신도비를 세웠는데 그 좌측에 '동창이 밝았느냐' 시가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창이 밝았느냐' 의 시조 배경은 어딜까? 이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가 己巳換局(기사환국)의 사화와 연관 되는 이야기다.

 

 

[옆쪽에서 담은 신도비 전경]

 

인현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장씨가 왕자 均(균)을 낳았다.
숙종은 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그 어미 장숙원을 희빈으로 삼아 버렸다.

이를 결사반대하던 송시열은 제주도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아 죽고 남인 세상이 되었다.

 

서인 정객들은 줄줄이 벼슬에서 파직되는가 하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서인의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도 이 기사환국을 빗겨 갈 수 없어 강릉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藥泉(약천) 南九萬(남구만)선생의 詩歌碑(시가비) 전경]

 

벼슬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셨는데..
그때 지은 시조중 하나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이다.

 

마을 묘역 입구쪽에 세워진 '詩歌碑(시가비)'

 

東方明否 鸕鴣已明(동방명부 로고이명)

東窓(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飯牛兒胡爲眠在房(반우호위면재방)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山外有田壟畝闊今猶不起何時耕(산외유전롱무활 금유불기하시경)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藥泉(약천) 南九萬(남구만)선생의 詩歌碑(시가비)]

 

23세에 사마시를 거쳐서 관찰사, 어사, 형조,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까지 출세 가도를 달리며 인조 때 나서 숙종 무렵을 살다 가신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러나 약천 선생이 가신 지 300년 후를 사는 우리들의 기억에는 그분의 성공적인 삶보다

'동창이 밝았느냐.....'란 단 한 수의 시조로 인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분으로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生前富貴(생전부귀)요, 死後文章(사후문장)'이란 말도 있으며,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도 바로 문장의 힘인 것이다.

 

 

[약천 묘소 략사 비]

 

산소는 여기서 300보 위쪽에 있다.
이 자리는 당시의 고승이신 一愚(일우) 스님이 남구만 생전에

동에는 靑蓮寺(청련사), 서에는 龍淵(용연)이 있는 명당이라고 천거한 곳이다.


이곳에 공보다 먼저 간 부인 東萊鄭氏(동래정씨)를 모셨다.
1711년 공의 나이 82세에 돌아가시자, 처음에는 楊洲(양주)에 모셨다가 10년 후 이곳에 이장하였다.


이장할 때 나라에서 세워준 석물은 그곳에 그대로 둔 채 이곳에는 장남의 간략한 친필 묘갈만을 세워 놓았다.

청렴 검소하신 뜻을 따른 것이었다.

 

 

[약천산소 표석]

 

[산소로 오르는 돌계단]

 

[묘역 전경]

 

앞서간 남편이 약천선생의 묘비를 살펴보고 있네요.

앞쪽 묘가 바로 藥泉(약천) 南九萬(남구만)선생 묘이다.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이다.

효종 2년(1651)에 과거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노론 소론 양파의 거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상 속에 약천은 1680년 대제학을 지낸 후

1684년 우의정, 1687년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까지 오른다.

 

 

[藥泉(약천) 南九萬(남구만)선생 묘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정면에서 담은 藥泉(약천) 南九萬(남구만)선생 묘]

 

부인 동래정씨와 합장한 묘이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1689년 기사환국으로 화를 입어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된 약천은 숙종 당시 격동의 정국을 이끌었다.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의 생애 대부분은 당파싸움으로 얼룩졌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일생을 보내다 83세에 돌아가시니,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