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작사가 응호(왕평) 묘소

2015. 7. 21. 05:52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골

 

[수정사 일주문 건립 안내팻말]

 

수정사 일주문 건립 관개로 인해 출입을 금지하였다.

잠시 망서리다가 방해가 안되는 곳까지 가보기로 하고 수정사를 피해

황성옛터 작사가 응호(왕평)의 묘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수정사와 외씨버선길 황성옛터 작사자의 묘역 안내팻말]

[외씨버선길 황성옛터 안내판]

[수정사와 황성옛터 작사가 산소 안내팻말]

[왕평 이응호(왕평)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영천이공 왕평응호지묘 표지석 전경]

 

안내판을 글을 읽기 전에는 왕평이공이 누구시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남편이 옛 묘소나 명당터를 찾아다니기에

아랫쪽 도로변에 세워둔 팻말을 보곤 곧장 꺽어 들었습니다.

 

그리곤 안내판 앞쪽 주차장에 주차해놓고

앞쪽 수정사는 나중 들려보기로 하고 서둘려 안내판을 읽어보니

세상에나 '황성옛터'를 작사하신분으로 유명하신 분이셨어요.

 

[영천이공 왕평응호지묘 표지석]

[입구쪽에서 담은 묘소로 내려가는 돌계단]

[계곡 건너편 묘소 오르는 돌계단]

 

본명은 李應浩(이응호, 1908년?~1940), 자는 光熙(광희).

배우로서는 예명 王平(왕평)을 사용했으며, 본명 이응호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 연극, 영화, 대중가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예술인이다.

 

[돌계단 위쪽에서 담은 묘역이 보이는 전경]

[묘소로 오르는 마지막 돌계단]

 

왕평 선생의 생애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가요사 자료에는 1901년, 영천지역 신문과 기타 자료에는

1904년으로 나와 있지만 호적부에는 1908년으로 나와 있다.

 

또 사망연도도 1940년, 41년, 43년설 등이 있지만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본 결과 1908년 출생에 1941년 사망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 합니다.

 

[묘소 전경]

 

내리락 오르락 또 내리고 오르고 드디어 묘소에 도착.

묘소가 작고 검소해 보였다.

봉분이 낮아서 그런지...

 

[묘비와 묘소 전경]

 

부친 동암 이권조(1885-1071)씨와 모친 김침동(1888-1913)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6~8세 때 수정사 주지를 맡았던 아버지를 따라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2번지 수정사 입구 마을의 민가에서 거주했다.

 

9세 때 영천보통학교(지금의 영천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서울 배재중학교에 입학해 졸업 후 조선배우학교에 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墓碑(묘비) 앞면]

 

王平李應鎬之墓(왕평이응호지묘)라 새겨져 있다.

 

[墓碑(묘비) 뒷면]

 

황성옛터 詩人(시인),

近園 金洋東書(근원 김양동서)라 적혀 있었다.

 

[우측에서 담은 묘소 전경]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의 제1기 입학생으로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다.

배우뿐 아니라 극작가와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0년대 초에는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에는 포리돌레코드의 조선 지점 설립에 관여한 뒤 문예부장을 맡았다.

 

[이응호(왕평) 묘]

 

좌측 상석이 놓인 작은 묘가 왕평선생의 묘

옆쪽 조금 큰듯 느껴지는(사실은 선생의묘가 너무 작아서 크게 보임) 묘가

아버지의 묘가 아닌가 하였지만, 검색결과 선생의 윗대 어른 중 한명의 묘같다 합니다.

 

유행가 115편, 서정소곡 3편, 재즈송 3편, 민요. 속요. 신민요 33편,

합창 행진곡 5편, 극. 극영화 30편, 난센스 21편, 스케치. 만담 5편,

승방애화. 전지미담 2편 등 작품 195편을 창작했으며 가요시가 전체의 58%이상을 차지했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빽빽하게 우거진 숲에 가려 안산이 보이지 않지만,

아늑한 곳에 모셔져 있었기에 마음이 놓이긴 하였지만,

숲속이라 그런지 그늘이 낮게 내려앉아 대낮인데도... 해그름 저녁무렵인듯 하였다.

 

그러나 다행인것은 묘소에는 햇볕이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듯 하였다.

 

[묘소에서 담은 앞쪽 전경]

 

일제 강점기에 민족혼을 일깨웠던 '황성옛터'의 노랫말은

1927년 어느 여름날 황해도 개성의 백천여인숙, 극단 硏劇舍(연극사)의

일원으로 공연하며 연일 쏟아지는 장마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와중에

문득 허물어진 옛 궁터인 개성 만월대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전수린이 바이올린 곡조를 오선지에 옮기며 작곡을 하고

이애리수의 노래로 그해 가을 단성사에서 무대에 올려지게 됐다.


 

슬프다 못해 절망적인 아픔으로 엄습해오는 이애리수의 애잔한 노래에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리며 통탄한 마음을 달래었다 한다.

 

[다시 담아 본 묘역 전경]

 

왕평과 전수린은 일경에 불려 다니면서 모진 고초를 당했고

황성옛터는 공연 금지곡이 되어버렸지만 이 노래는 점점 더 민족가요로 사랑을 받았다.



왕평은 이후에도 민족성 강한 노랫말을 담은 대한팔경, 조선행진곡 같은

노랫말을 만들었으나 모두 금지곡이 됐고 1940년 평북 강계에서 연극 '아버지'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쓰러져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내려오며 담아 본 돌계단]

 

만담가 나품심과 정식 혼례를 올리지 않은 채

동거생화를 하였지만, 후손을 두진 못하였다 합니다.

1930년대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두루 돌면서 악극단 공연에 중점을 뒀다. 


 

주요 작품으로는 '황성옛터', '대한팔경', '고도의 정한',

'비오는 포구', '비단장사 왕서방', '신아리랑', '신쾌지나 칭칭' 등이 있는데

모두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애환과 혼을 불러일으켰던 기념비적인 노래다.


특히 '대한팔경', '항구의 일야'

조선인을 선동하는 노래라 하여 발표가 금지되기도 했다.

 

[묘역을 떠나기전 묘소 입구쪽 돌계단에서 담은 묘역 전경]

 

1933년부터 8장이 발매된 인기 극음반 '항구의 일야'

그가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을 맡은 것이다.

 

요주의 인물로 찍힌 왕평의 장례는 일경의 눈을 피해 몰래 진행된다.

조계사 마당에서 화장이 이뤄진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올라온

아버지 이권조에게 넘겨진 유해는 청송군 파천면 목계리 수정골에 묻혔다.

그리고는 왕평은 완전히 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