磻溪(반계) 유형원(柳馨遠) 선생 墓(묘)

2015. 7. 15. 04:20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
경기도 기념물 제31호

 

[반계선생 묘소에서 마주 보이는 조비산(투구봉)]
 
磻溪(반계) 선생의 묘를 찾아 가는 길에
선생의 묘에서 마주 보이는 조산인 조비산을 담아 보았다.
사진으로 보이는 조비산 뒤쪽 산 중턱쯤에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선생의 묘소 안내석과 안내팻말]
 
여기까지는 순조로웠지요.
팻말에서 알려주는 대로 오솔길을 한참을 더 들어가니
외딴곳에 건물이 한채 있었습니다.

 

[안내팻말]
 
건물 마당 한 켠으로 안내팻말이 보이는 곳에
우선 주차를 해 놓고, 묘지로 향하려 하였더니...
건물안에서 주인이 나와서 왜 오셨느냐 물으신다.
여차여차해서 왔다고 하니, 이곳은 개인집이니 이곳까지 들어오면 안된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처다보네요...ㅠ.ㅠ
 
오면서 보았지만, 마땅히 주차할 곳도 없었다.
잠시만 세우고 묘소에만 들려보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묘소로 향하였다.

커다란 개가 서너마리 컹컹 무섭게 짖어대어
오금이 저렸지만, 묘역에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서둘려 발길을 재촉하였다.

 

[건물 옆 담을 끼고 흐트러지게 핀 망초꽃]
 
망초꽃이 하얗게 핀 오솔길을 따라
발걸음도 가볍게 묘소로 향했지요.

 

[묘소 가는 길 우측에 핀 망초꽃]

좌측으로 오르고 우측으로 오르며
잡초가 우거져 길도 보이지 않은 묘소를 향해 올랐지만,
수풀과 잡초가 우거져 더 이상의 접근을 막는듯...
결국 찾지 못하고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아래 사진은 아주 오래전에 다녀온 사진으로 묘역 소개를 해 볼까합니다.

 

[묘소 가는 길]

[반계 유형원선생 묘역 전경]
 
유형원(柳馨遠, 1622~1673) 본관 문화, 자 덕부(德夫). 호 반계(磻溪)
 
그는 서울 정릉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건국 후 200여년이 지났고,
조선의 체질적 변화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며 한편 兩亂(양란)을
거치면서 엄청난 피해를 겪은 시절이었다.

아버지 欽(흠)은 그가 2살때인 1623년에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복위를 도모했다는 柳夢寅(유몽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다.
 
2살에 아버지가 죽자, 1627년 정묘호란, 1636년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반계 유원형 묘]

이러한 환경변화는 사상과 생활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흉년과 기아,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한 벼슬아치들이고통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高談峻論(고담준론)하는 유식자들을 비판하였다.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비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당대의 권세가들이 권유하는 벼슬도 마다하였다.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양반의 권위가 실추되어가는 시대에
과거급제해서 벼슬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대접도 못 받고 생활 수단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였기에 그의 결단은 비장한 것이었다.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1653년 32살 되던 해에
전북 부안 愚磻洞(우반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의 號(호), 磻溪(반계)는 그 동네 이름에서 나왔다 한다.
 
'到扶安(도부안) 부안에 도착하여' 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묘비]
 
묘비는 1768년 홍계희가 지었고
죽산부사 兪彦摯(유언지) 가 세웠다 한다.

이후 부안군 우반동 변산의 산자락에 '磻溪書堂(반계서당)'을 짓고
성리학과 실학 사상 연구와 농업,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 등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32세에서 49세까지 '磻溪隨錄(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後(후)의 어려운 국정을 회복하고자
반계수록을 저술하였으며, 조선조에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전경]
 
반계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기도 하였지만,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야인으로만 살았다.
 
선생은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하는데 학문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내려 오다 담은 건물 담 옆 흐트려지게 핀 망초꽃]

그의 저서 磻溪隨錄(반계수록)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를 개편, 세제·녹봉제의 확립, 과거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 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 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
 
뒷날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實學(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영조 46년(1770)
영조의 명으로 磻溪隨錄(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되었다.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위의 磻溪隨錄(반계수록) 과 郡縣制(군현제) 1권이 전할 뿐이다.
 
호조참의. 찬선에 추증되었고, 부안 東林書院(동림서원)에 제향되었다.

 

[망초꽃과 초아]
 
묘역을 찾지 못하여 편하지 못한 마음을 활짝 핀 망초꽃이 달래주었답니다.

 

[입구쪽에서 담은 묘역이 있는 전경]

그는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三田渡碑(삼전도비)를 세운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늘 괴로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41세 되던 해 한성부에 올라와 외가인 정동에 머무르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中興偉略(중흥위략)'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끝내 완성은 보지 못했으나 그의 뜻은 매우 컸다고 한다.

이후 그는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 조정에 건의하였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준마를 기르며 말을 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했으며, 무예에도 능했던 그는 직접 병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했으며 집안의 종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200여 명의 군민들을 단련시키는 한편 중국현지에
사람을 보내 중국의 정세를 알아보기도 하였다.


사후에 1753년 유일로써 증직으로
贈(증) 通訓大夫司憲府執義(통훈대부사헌부집의) 겸
世子侍講院進善(세자시강원진선)에 追贈(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