蛟山(교산) 許筠(허균) 墓所(묘소)

2015. 7. 16. 20:51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3

 

[허균 묘소 안내팻말]

 

높다랗게 붙어 있는 안내팻말

주변을 뱅뱅 두어번은 들린것 같다.

네비양은 근처에 왔으니, 안내를 마친다고 안내를 마치고...

주변에 사시는 분들께 여쭈어 여쭈어 찾아왔다.

 

[遷奉記念碑(천봉기념비) 전경]

 

[遷奉記念碑(천봉기념비)]

 

許筠(허균)의 가족 墓域(묘역) 입구에 세워진 遷奉記念碑(천봉기념비)를 세운 이유는

원래 허균가족묘지는 본래 서울 서초동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를 기념해 1968년 이 비석을 세웠다 한다.

 

[許草堂(허초당) 神道碑(신도비)]

 

20여 미터 안쪽 우측에는 허초당의 신도비가 서 있으며, 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한석봉이 썼다 합니다.

 

허균의 아버지 許曄(허엽)은 중종 12년(1517) 출생하였고 號()는 초당(草堂)이다.

강릉 초당은  號()에서 따온 마을 이름이며 초당 두부로 유명하다.

명종 1년(1546)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대사간에 오른 후에는 鄕約(향약)의 시행을 건의 하기도 하였다.

 

[蘭雪軒(난설헌) 許楚姬(허초희) 詩碑(시비) 앞면]

 

神道碑(신도비) 뒷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비가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허균의 누이 1969년에 세워진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詩碑(시비)이다.

 

앞면에는 '蘭雪軒許楚姬詩碑(난설헌허초희시비)'’라 쓰여 있고, 그 좌측 위쪽에는

친필을 네모지게 테두리를 두르고 음각하였는데, 글씨가 아담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획의 뻗침과

붓의 놀림이 시원하고 조화로와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하여 집에 걸어 놓는다 한다.

 

그 내용은 '閒見古人書(한견고인서)', 곧 '한가하면 옛 사람의 책을 보라'는 뜻으로

난설헌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고 여러 사람의 문장을 섭렵하였는지를 여실히 들어내는 글귀이다.

詩碑(시비) 뒷면에는 생전에 지은 시를 1969년 시를 추모하는 문인들에 의하여 刻()을 하여 놓았다.

 

[蘭雪軒(난설헌) 許許楚姬(허초희) 詩碑(시비) 뒷면]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하늘하늘 창문 아래 난초 있는데

枝葉何芬芳(지엽하분방)  잎들은 어찌 그리 향기로울까.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  가을바람이 한번 스치고 나면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슬프게도 가을 서리에 시들어버리네.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빼어난 그 모습 시든 후에도

淸香終不死(청향종불사)  맑은 향기는 없어지지 않는구나.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이 모든 것이 내 마음 아프게 하니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떨어지는 눈물이 옷소매를 적시누나.

 

출가 외인이라 난설헌의 묘는 이곳에 없으며, 경기 광주시

시댁의 묘역에 같이 있고 이곳은 蘭雪軒(난설헌) 許楚姬(허초희)의 詩碑(시비)만 있다.

 

[陽川許氏(양천허씨) 始祖(시조) 許宣文(허선문) 壇(단)]

 

始祖(시조) 許宣文(허선문)은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후의 30세손으로 고려시대 대광공이었다.

대대로 공암촌(김포군 양천)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마침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였었는데 군량을 보급하여 군의 사기를 회복케 함으로써 후백제 견훤을 대파하였다.

태조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假父(가부)라 칭하고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로 인해 본관을 공암(양천)으로 하였다.

 

[묘역 입구쪽에서 담은 가족묘역 전경]

 

[아래쪽에서 담은 許筠(허균) 묘역 전경]

[許筠(허균) 墓(묘) 전경]

 

부친 許曄(허엽)과 형 許?(허봉)의 중간쯤에 '洪吉童傳(홍길동전)'의 저자 許筠(허균)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墓碑(묘비)]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禮曺判書 陽川許公諱 筠之墓. 貞夫人 安東金氏. 貞夫人 善山金氏.

(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예조판서 양천허공휘 균지묘. 정부인 안동김씨. 정부인 선산김씨)라 쓰여 있다.

 

[墓碑(묘비) 뒷면]

 

[묘앞 우측 文人石(문인석)]

[묘앞 좌측 文人石(문인석)]

 

[좌측 옆에서 담은 묘 전경]

 

許筠(허균, 1569~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 端甫(단보), 호 蛟山(교산) 惺所(성소)이다.

강릉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5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시를 지을 수 있었고,

학문은 柳成龍(유성룡)에게, 시는 三唐詩人(삼당시인)인 李達(이달)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 허봉의 친구로 당시 원주 蓀谷里(손곡리)에 살았는데, 인생과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전하여 진다.

 

교산은 26세(1594년)에 庭試文科(정시 문과)의 乙科(을과)에 합격하여 說書(설서)를 지냈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황해도 都事(도사)가 되어 부임하였으나, 서울에 있는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만에 파직되었다.

이 것이 그의 첫번째 파직이고, 그 후 그는 (春秋館記注官(춘추관기주관) 형조 정랑을 지내고,

1602년에는 司藝(사예) 司僕寺正(사복시)을 역임하고 원접사 李廷龜(이정귀)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으나,

1604년 遂安郡守(수안군수)로 재직할 때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고 그에 심취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 때 술회하기를, "만약 내가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다면 한 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
라고 할 정도로 한때는 출가하여 중이 되려 하였다 한다.

 

[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을 영접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교산은 학문과 글 재주를 높히 평가 받아

그와 교유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누나인 허난설헌의 시집을 중국서 간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산은 이 공로로 삼척의 부사가 되었는데, 이 곳에서도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 일로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 공주목사로 기용되었는데, 이 곳에서는 그 지방의 庶流(서류)들과 가까이 지낸 관계로 또 다시 파직 당하였다.

파직 후 전라도 부안에 내려가 그 곳의 산천을 유람하였고, 이 때 그 곳의 명기인 李桂生(이계생)을 만나 서로 깊이 사귀었다.

계생은 조선의 3대 詩妓(시기)로, 松都(송도)의 黃眞伊(황진이), 成川(성천)의 金芙蓉(김부용)과 더불어 扶安(부안)의 名妓(명기)이며, 호 梅窓(매창)이다.

지금도 전라북도 부안에서 멀지 않는 곳에 '梅窓(매창)의 묘가 있다.

 

[묘 앞 산딸기]

 

선조 39년(1606)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광해군 5년(1613) 癸丑獄事(계축옥사)로 한때 친교가 있던 박응서 등이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당대의 權臣(권신) 이이첨에게 의존하여 예조참의 호조판서 승문원부제조를 지냈으며 광해군 9년(1617)

廢母論(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좌참찬으로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하인준 등과 反() 광해군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家産(가산)이 籍沒(적몰)되고 8월 24일 50세를 일기로 斬刑(참형)되었다.

 

反逆罪(반역죄)로 斬刑(참형) 당하여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서

그의 魂()만을 달래는 招魂葬(초혼장)을 치르게 되어 허균의 묘에는 屍身(시신)이 없다 한다.

 

洪吉童傳(홍길동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名著(명저)를 남겼으며 문집으로 惺所覆?藁(성소부부고)가 있다.

 

허균의 한시 한수를 소개 하며 마칠까 합니다.

 

行至沙(지사촌) 사촌에 이르다.


行至沙村忽解顔(행지사촌홀해안)

사촌에 당도하자 얼굴 문득 풀리나니

蛟山如待主人還(교산여대주인환)

교산은 주인 오길 기다린 것 같네 그려


紅亭獨上天連海(홍정독상천련해)

홍정에 올라보니 하늘 바다 연대있고

我在蓬萊縹緲間(아재봉래표묘간)

봉래산 아득한데 그 사이에 내가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