頭陀山(두타산) 三和寺(삼화사)

2015. 10. 22. 06:21문화산책/사찰 탐방

 

소재지 :  강원도 동해시 三和洞(삼화동)

 

 

[일주문]

강원도 동해시 頭陀山(두타산) 三和寺(삼화사)

청옥산과 한 산맥으로 山水(산수)가 아름다운 명산으로

사계절 등산 코스로 이름이 높아 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산이다.

깎아지른 암벽이 노송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니,
비경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아름다운 풍광이 어우러진
무릉계곡을 小金剛(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일주문 을 통과하며 담아 본 단청]

 

[무릉계곡]

고려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때에 삼척부사로 재직 하고 있던
김효원이 제명 하였다고 한다.

 

 

[三和寺(삼화사)]

무릉계곡의 초입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무릉반석

조금 위쪽에 동해시 최대의 사찰 三和寺(삼화사)가 자리잡고 있다.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자장율사가 두타산에 절을 짓고
흑연대라고 하였다가, 신라 경문왕 4년인864년 범일 국사가 절을 개축하여
삼공암이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하였다 한다.

현재 삼화사에는 세 가지 창건설이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말기의 어느 날에 각각 많은 무리를 거느린 세 사람의

神人(신인)들이 이곳으로 와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버리자 이곳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이라 이름지었으며,
그 후 얼마 뒤에 사굴산문의 開山祖(개산조)인 범일국사가 이곳에 들러
절을 창건하고, '삼공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을 뒷받침이나 하듯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조선시대에 와서 태조는 칙령을 내려 이 사찰의 이름을

문안에 기록하여 후사에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인이 절터를 알려 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 하시면서,

"그 옛날 신성한 왕이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그 사실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로 하라"
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고려의 태조 왕건이 불력에 의해 후삼국을

화합하여 통일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한다.

 

 

[天王文(천왕문)]

여러 가지 창건설을 간직한 삼화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약사전만 남았었는데,
현종 1년(1660년)에 중건되었고, 순조 23년(1823년)과 고종 43년(1906년) 두 차례의
재난에 의해 소진되었던 것을 재건축하는 등 생생한 역사의 기록장이기도 하다.

그 후 여러 차례 소실, 중건하였으며 1997년에 쌍용채광권 내에 편입됨으로
인해서 옛날 중대사가 있었던 곳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88년 전통사찰로 지정된 삼화사는 사찰 내에 도지정 문화재인
삼화사철불 및 삼층석탑, 삼성각 등 많은 문화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동석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두타산성은 무릉계곡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피사왕 23년에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

 

 

[천왕문을 통해서 본 삼화사 삼층석탑과 대웅전모습]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왜군이 이곳에 쳐들어 와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산성으로 피난하였고 이 고장 청년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격침한 항쟁지로 그 성터가 남아 있다.

 

 

[빈 사천왕 자리]

예전같으면 이 자리에 어김없이 사천왕이 자리잡고 있었다.
창을 들고 눈을 부라리며, 잡귀를 쫓았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모든 사찰에 다녀보아도 사천왕을 세워둔 곳은 거의 없고,
이렇게 빈 자리만 남겨둔 곳이 많았다.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須彌山(수미산)의

중턱에 있는 四王天(사천왕)의 主神(주신)인 네 명의 외호신이다.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一柱門(일주문)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彫像(조상)을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며,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라 한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안내판 글 내용]

 

 

<삼화사에 얽힌 전설 둘>
신라 서라벌에 진골 출신의 아름다운 세 처녀가 있었다.
이들은 집안 어른들끼리 가깝게 지내는 사이었으므로 절친하게 지냈다.
혼기를 맞은 그녀들이 신랑감을 고를 무렵, 신라와 백제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청년 장수 김재량은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며,
왕궁에서는 김재량을 위해 축하연을 열었는데 공교롭게도 세 처녀가 모두 이 자리에 참석했다.

 

김재량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세 처녀를 본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녀들 또한 김재량을 사모하는 마음 걷잡을 수 없었다.
그녀들은 각자의 시녀를 통해 연정을 전했다.
김재량은 뛸듯이 기뻐하며, 하나도 아닌 세 처녀를 번갈아가며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소문은 파다해졌고 세 처녀는

좋은 친구 사이에서 서로 질투하고 적대시하는 사이로 변했다. 

그러던 중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어 김재량은

다시 전쟁터로 나가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다 그만 고구려군 첩자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김재량을 너무도 사랑한 세 처녀는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모두 산으로 들어가 두타고행을 하여 마침내 여신이 되었다.

그 산이 바로 오늘의 강원도 동해시에 위치한 두타산이라 한다.

나림여신, 혈레여신, 골화여신이 된 그들은 도를 얻고 신력을 갖추고서도
진실을 깨닫지 못하였는지 김재량의 죽음을 서로의 잘못으로 미루며 저주했다.

또 그녀들은 그곳 주민들이 산에 치성드리기를 원했고 복종치 않으면 재앙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에 성지를 개산하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자장율사는 두타산의 산세에 감격, 그곳으로 향했다.


이때 자장율사를 본 나림여신은 자신의 도를

시험하는 한편 스님이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자장율사를 유혹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이 산의 산세가 하도 좋아 절을 창건할 인연을 찾으러 왔소."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사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산길이 험하고 힘들 것이니 훗날 절이 창건되거든 오시지요." 


여인의 동행을 거절한 자장 스님은 초가을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산길을 삼경이 가깝도록 걸었다.

문득 인기척이 나는 듯싶어 뒤를 돌아본 자장 스님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먼발치에 여인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장율사는 따라오는 여인에게 사연을 듣고 싶었으나 모르는 척 걸음을 재촉했다.

골화전에 이르러 자장율사는 외딴 주막집을 발견, 하룻밤 유숙키로 했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여인은 스님이 계신 방에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목이 컬컬하실 텐데 우선 한 잔 드시지요."
잠시 대답이 없던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여인이여, 당신은 지금 신력을 얻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는군요.
자신의 몸뚱이가 더러운 물건을 싸가지고 다니는 것인 줄 모른다면 이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정도의 신력을 얻었으면 좀더 공부하여 열반의 세계에 안주토록
하시지요."
나림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스님!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앞으로 깊은 불법을 일러주십시오."
"나림 여신이여! 참으로 장한 발심입니다."
"어떻게 제 이름을…?"
"내가 잠시 선정에 들어 관하여 보았지요."


나림은 그만 감동하여 그 시각부터 스님에게 귀의했다.
처소로 돌아와 혈례와 골화여신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함께 귀의할 것을
권했으나 두 여신은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까짓 스님 하나 유혹 못하고 오히려 매수당하다니 우리 여신들의 체통이
말이 아니다. 우리 둘이 함께 가서 혼을 내주고 이곳에 절을 창건치 못하게 하자.
만약 절을 세우면 주민들이 우리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을 테니까."
"그 참 좋은 생각이구나."

 

혈례와 골화는 즉시 호랑이로 변신하여 자장 스님 앞에 나타나 길을 막았다.

"이런 무례한 노릇이 있나. 아무리 축생이기로서니 스님의 길을 막다니, 어서 썩 물러가거라."

"어흐흥…"

호랑이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스님은 금강삼매에 들어 몸을 금강석같이 굳혔다.

호랑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한 마리는 발톱으로 스님을
내리쳤고, 또 한 마리는 스님의 옆구리를 물었으나, 사납게 달려든

호랑이는 발톱과 이빨만 다치고 말았다.

호랑이는 더욱 화가 나서 맹렬히

달려들다가 결국은 꼬리를 사리면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자장율사가 주문을 외우니 큰 칼을 든

금강사가 나타나 도망치는 호랑이를 한 손으로 잡아왔다. 

"자 이제 너희들의 본색을 드러내거라."
어쩔 수 없이 본 모습으로 돌아간 여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참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들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잘못을 알았으면 두번 다시 그런 죄를 범치 말도록 하시오.
미움과 시기, 질투는 모두 욕심에서 비롯되니 오늘부터 욕망의 불을 끄는
공부를 하여 이미 얻은 신력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시오."

이때 언제 왔는지 나림여신이 와 있었다.


"스님, 스님의 원력으로 우리 모두 발심하게 되었음을 깊이 감사드리며
제가 앞장서서 금당 자리를 안내하고 스님을 도와 사찰 창건에 동참 하겠습니다."

자장율사는 나림여신이 인도한 장소에 불사를 시작하니

세 여신은 장사로 변하여 무거운 짐을 나르고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절을 쉽게 세워졌다.

 

그 후 세 여신이 화합 발심하여 창건한 절이라 하여

이 절을 삼화사라 명했고 마을 이름도 삼화동이라 불렸다한다.

 

 

 

<호암소에 얽힌 전설 셋>

옛날 신라시대에 지금의 강원도 삼화사에

지혜가 출중한 주지 스님이 상좌 스님과 함께 수도하고 있었다.

어느 눈 쌓인 겨울날 저녁 예불을 올리려고 두 스님이 법당으로

향하는데 아리따운 규수와 침모인 듯한 중년 여인이 경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잠시 발길을 멈춘 두 스님은 정중히 합장하며 인사 올리는 두 여인을 맞았다.

"눈길이 험한 늦은 시각에 어떻게 이리 오셨습니까?"

주지 스님이 묻자 예의범절이 반듯해 보이는 규수가 조용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서 몹시 편찮으시옵니다.

부처님께 칠일 기도를 올려 어머님의 빠른 쾌차를 빌고자 합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상좌 스님은 왠지 가슴이 설레였다.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채 말하는 규수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부터 기도에 들어간 규수와 침모는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부처님께 간곡한 기도를 올렸으며

주지 스님도 그들을 위해 철야정진을 했다.


상좌 스님 역시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 시봉을 했다.
나무를 하고 밥을 지으면서도 늘 아름다운 규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행여 밥이 질지나 않을까 싶어 두번 세번

솥 속에 손을 넣어가 밥물을 가늠했고 법당 청소도 여느 때보다 더 깨끗이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 밤. 규수는 꿈에 수염이 긴 스님을 뵙게 됐다.

"이제 얼굴의 수심을 거두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회향토록 하라.
네 간절한 정성을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실 것이니라."

꿈에서 깬 규수는 뛸듯이 기뻤다.
그녀는 더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마치고는 집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주지 스님, 그간 너무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정성껏 기도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원 별말씀을요. 모든 중생의 아픔은 바로 우리 출가자의 아픔과
다름없으니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규수와 침모가 떠난 며칠 뒤 이상스럽게도

건강하던 상좌 스님이 심한 열병으로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네가 기도 시중을 드느라 힘이 들었던 게로구나. 병이란 마음의

번뇌망상과 잡념에서 오는 것이니 누워서도 염불정진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주지 스님은 상좌 스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타이르고는

눈쌓인 첩첩산중에서마을로 내려와 우선 약값에 필요한 탁발을 하려고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시주를 구했다.

"아니, 스님께서…"
시주쌀을 들고나온 여인은 얼마 전 삼화사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간 침모였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백약이 무효이던 마님의 병환이 씻은듯이

완쾌되시어 그러잖아도 날이 풀리면 인사드리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인연의 끈이란 지중한 것이로구나고 생각한 스님은

안으로 들어가 잠시 인사를 받고는 몸져누운 상좌 생각에 곧 자리를 떴다.

약을 구해 들고 다시 삼화사로 돌아오느라니 어느새 밤이 깊어 스님은 걸음을 재촉했다.
스님이 지금의 동해시 무릉계곡을 지날 때였다.

 

 

[범종]

어디선가 갑자기 "어흥" 하는 소리와 함께 큰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밤중이긴 했지만 늘 다니던 길인 데다 온 산에 덮인 눈 덕분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스님은 꾀를 내어 바로 눈앞에 있는 폭10m가 넘는 절벽과 절벽 사이를 법력으로 뛰어넘었다.

이를 본 호랑이는 사람도 넘는데 내가 못 넘으랴 싶어

얕잡아보고는 절벽과 절벽 사이로 몸을 날렸다.
순간 "풍덩"소리와 함께 호랑이는 절벽 밑에 있느 깊은 沼(소)에 떨어져 죽었다.

호랑이가 성공하면 스님은 잡아 먹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두타산 신령이 스님을 구해 준 것이라한다.

그 후 삼척부사 김효원은 이 소를 '호암소'라 부르게 했고

남쪽 암벽에는 지금도 '虎岩(호암)'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다.

 

 

 

[두타산 풍경]

 

[두타산 풍경 2]

 

[속이 텅 빈 노거수]

 

속이 다 타들어가 텅빈 껍질만 안고 버티고 서 있는 노송
가느다란 한줄기 목숨이 가지끝에 나뭇잎을 매달고 아직도 수천년을 더
지켜내려갈 것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찬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가슴속 깊숙이까지 바람과 빗물의

통과시키며 喜怒(희노)에 물들지 않고 다시 또 천년을 버터가야할 애처로움이여....

 

 

[내려오며 담은 삼화사 일주문]

 

아주 오래전 2007년 8월26일 다녀온 곳이지만,

정리하며 올리는 이 순간 그때 다녀온 무릉계곡과 삼화사가

눈앞에 파로나마처럼 펼져져 보입니다.

 

두타산 삼화사 소개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