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龍珠寺(용주사)

2015. 10. 11. 06:35문화산책/사찰 탐방

소재지 : 경기 화성시 송산리 188번지

 

[思悼世子(사도세자)의 원찰 龍珠寺(용주사)]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 기슭에 龍珠寺(용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가 당파싸움에 희생양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하여 지은
용주사는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했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기에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절을 지을 때 정조가 보경스님을 시켜 만든

佛說父母恩重經板(불설부모은중경판)도 보관되어 있다.

 

부모가 자식을 잉태하여 낳고 기르기까지의 은혜와 그 은혜를 갚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불교경전으로 자식에게 효를 강조하는 것만 아니라,
부모의 구실까지 생각해 보게 하는 효에 관한 경전이다.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영조가 세자에게 思悼(사도) 라는 호를 내려 사도세자라 부른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한 많은 세자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용주사 외삼문 전경]

 

龍珠寺(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葛陽寺(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이 높은 도량이었는데 병자호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願刹(원찰)로 삼았다.

 

사도세자 顯隆園(현륭원), 지금의 隆陵(융릉)의 造泡寺(조포사)로 건립된

사찰이기에 삼문 좌우로 줄행랑이 달려 있어 꼭 별묘의 삼문형태와 같은 것은

아마도 사도세자 현릉원의 재궁으로 지어졌으므로 이런 건축 양식이라 하겠다.

 

 

[龍珠寺(용주사) 외삼문]


龍珠寺(용주사)란 현판이 걸려 있고(죽농 안순환의 글씨)

 

네 기둥의 柱聯(주련) 에는

'龍珠寺佛(용주사불)'의 네 자를 첫 글자로 한 네귀의 柱聯(주련)이 관심을 끈다.  

 

龍蟠華雲 (용반화운)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珠得造化 (주득조화)여의주 얻어 조화 부리다가

寺門法禪 (사문법선)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佛下濟衆 (불하제중)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천보루 전경]

 

삼문 안에 들어서면 누각 형태의 天保樓(천보루) 건물이 나타나고,
天保樓(천보루) 돌기둥 밑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서니 天保樓(천보루) 뒤편에

弘濟樓(홍제루)현판이 걸려 있는데 此愚(차우) 金瓚均(김찬균)의 글씨이다. 

 

좌측 벽면에는 姜大連(강대련) 주지의 기념 휘호들을

판각해 놓은 목판이 걸려 있어 친일파의 승려..........
한용운등 기개 있는  승려들에 의해서 鳴鼓出送(명고출송)까지

당했던 강대련 화상의 화려한 단면을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천보루 안내판 글 내용]

 

[대웅보전 전경]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네귀둥이에

활주가 받쳐져 있으며, 大雄展 내부에는 부처님 세 분을 모셔 놓고 있다. 

중앙이 석가여래이고, 동쪽이 동방약사여래, 서쪽이 서방아미타불이 아닐까?

후불탱화의 배관을 바라보며, 이 탱하가 조선후기의 대표적 화원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삼계여래 후불탱화라 傳해 내려오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후불탱화를 그린 사람이 단원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 단원이 그렸다고 믿으며...
단원의 인물화는 산들바람을 맞은 옷자락이 펄럭이듯 유려하게 휘날리는

당풍세의 옷자락 표현이 최고라하니 인물 표현 기법을 보는 것도 큰 행운이다.

 

계단 동쪽에 正祖(정조) 수식수라 전해주는 수령 300년 정도의

천연기념물 제10호 회양목이 초연한 모습으로 담담하게 서 있다.

 

 

[용주사 대웅보전 안내판 글 내용]

 

[용주사 범종]

 

국보120호인 범종은 높이 145m, 직경86cm, 중량1,500킬로그램으로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 오는 것으로 종의 몸통이에는 신라 문성왕16년(854)에

이 종을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으나 그 양식이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용주사 범종 안내판 글 내용]

 

[恩重經塔(은중경탑) 전경]

 

대웅전 뒤를 돌아 동쪽 편에 3층 恩重經塔(은중경탑이 서 있다.
정조가 하사한 '父母恩重經版(부모은중경판)'을 복각하여 세운탑이다.

 

아마도 용주사의 창건은 오직 축성전의 존재 때문일 진데 축성전이 있던
지장전 부근을 거닐며,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해 줌도 또한 뜻이 있으리라...

 

박물관에서 正祖 글씨의 특장이 잘 드러나 있는 정조 어제 어필의

'山 龍珠寺 奉佛 祈福偈(산 용주사 봉불 기복게)'도 보고, 채제공이 주황색 운문단에 짓고 쓴
'花山 龍珠寺 上樑文(화산 용주사 상량문)'을 보는 것도 큰 福(복)이라  생각해 본다.

 

 

[효의 고장 화성시 안내판 글 내용]

 

[용주사 해태상]

 

문 입구에서 운주사를 지키는 평화스러우며 아담한

해태상을 보며, 우리민족의 손재주의 우수성을 새삼 느꼈다.

 

이곳에서 1km 더가면 莊祖(장조)의 隆陵(융릉)과 正祖(정조)의 健陵(건릉)이 있는 隆健陵(융건릉)에 도달한다.
운주사를 먼저 들리든지, 隆健陵(융건릉)에 먼저 들리든지, 걸어서라도 갈 수 있는 곳에 있는 두 곳을 들려보고 가면 좋으리라...

 

隆健陵(융건릉)을 향하여 떠나며, 사도세자의 원통함과 정조의 효심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