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淸(산청) 洗心亭(세심정)

2015. 7. 23. 05:55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洗心亭(세심정) 전경]



덕천서원 앞 덕천강 기슭에 세워져 있는 洗心亭(세심정)

남명 선생이 세상을 떠난 4년 후인 1576년 선생의 제자들이 덕천서원(당시는 덕산서원이었음)을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나서, 1582년 서원 건립에 앞장섰던 남명의 제자 守愚堂(수우당) 崔永慶(최영경)

선조 15년(1582)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세운 정자이다.

 

[洗心亭(세심정) 전경 2]

 

'洗心亭(세심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남명의 제자이자 성리학자였던 河沆(하항)이 지은 것으로,

'周易(주역)'에 나오는 '聖人洗心(성인세심)' 마음을 씻는다. 라는 문구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洗心亭(세심정) 옆 詩碑(시비)]

[詩碑(시비) 내용]

 

세심정 옆에는 남명 선생의 시비가 있다.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쌓인 사 십년 간의 허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洗心亭(세심정) 현판]

[洗心亭(세심정)]

현재의 정자는 여러 번 개축하여 건립당시의 모습은 아니라 한다.

기록을 보면 1582년 문밖 시냇가에 2칸으로 세웠다고 하나,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렸다.

 

[洗心亭(세심정) 천정]

[洗心亭記(세심정기)]

 

세심정에 걸려 있는 河受一(하수일)이 지은 기문에 '군자는 은거해 수양하며 한가히 거닐며 휴식한다.

대개 은거해 수양하는 곳에는 한가히 거닐며 휴식하는 곳이 있는 것이 옛날 도리이다.' 라고 세심정을 지은 이유가 적혀 있다.

 

[좌측에서 담은 洗心亭(세심정) 전경]

 

임진왜란 후 복원하면서 '醉醒亭(취성정)'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醉醒(취성)이란 말은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말로 '세상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했어도 나만 홀로 깨어있는다.'는 뜻이라 한다.

그 후 1815년 중수 후 다시 '風詠亭(풍영정)'이라 고쳤다. 이 이름도 논어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우측에서 담은 洗心亭(세심정) 전경]

 

1870년 덕천서원이 훼철되자 다른 곳으로 옮겨 지었다가 도로 확장 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洗心亭(세심정) 아래 덕천강과 노거수]

 

그 시기는 대략 1920년쯤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원래 2칸이었던 것을 1칸으로 복원 하면서

원래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洗心亭(세심정)란 본 이름도 찾게 되었다.

 

[덕천강과 노거수 풍경]

덕천강에 얽힌 남명선생의 얘기를 소개합니다.

남명 선생이 67세 되던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셨다.

남명은 그날 덕천강변에서 꺽지회를 드셨는데, 그 앞으로 말을 거꾸로 타고 지나가던 오일봉

"산림처사는 국상이 나도 술이나 먹고 있는가?"



남명은 입속의 꺽지를 뱉고 일어서 곧 바로 북향사배 상복을 입었다는데 남명 선생의 입에서 나온 꺽지는 살아났다 한다.

그후 덕천강 꺽지는 그때 상처로 인해 한쪽 눈이 멀었다고한다.

 

[洗心亭(세심정)쪽에서 담은 덕천서원 전경]

 

새끼일 때는 양 눈이 멀쩡하나 철들만큼 크면 한 쪽 눈이 백태 꺽지는 덕천강의 '외눈박이 물고기' 로 알려지게 되었다 합니다.

산청 덕천서원은 소개해 드렸으니 여기선 생략합니다. 혹 그때 못 보신 분들은 요기 클릭 하셔서 들려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