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順(화순) 同福男德院碑(동복 남덕원비)

2019. 9. 2. 05:40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459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9호

 

[동복오씨 시조공 신도 표석비 전경]

 

답사길에 만난 범상찮아 보이는 곳을 바쁜 일정 때문에 그냥 스쳐 지나쳤다.

그리곤 다시 그곳을 지나치게되어 잠시 들렸다 가자하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 들리게되었다.

 

[동복오씨 시조공 신도 표석비 좌측 전경]

 

'옛 이야기가 있는 쉼터 同福(동복)'이란 테마로 꾸며져

있으며, 남덕원비 이외에도 각종 기념비와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옛 이야기가 있는 쉼터 同福(동복) 전경]

 

고려인삼 유래비, 기묘사화의 명현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인간문화재 소목장 송추만 선생 기적비 항일독립투사 송계 정태봉 선생 기적비,

동복농악비, 동복오씨시조공신도비가 있다.

 

[쉼터 표지석 앞면 전경]

[쉼터 / 글 / 문제선]

[쉼터 조성비 뒷면 전경]

[쉼터 조성비 글 내용]

[동복면연혁비 전경]

[동복면 연혁비 글 내용]

[고려인삼 '福蔘(복삼)' 유래비 전경]

 

고려 때 화순군 동복면 유천리에살던 최씨가 중병이 들어

약을 복용하였으나 백약이 효험이 없어 죽음만 기다리게 되었다.


아내가 매일 모후산 바위밑에 가서 신령님에게 남편의 병이 완치되도록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수염이 하얀 신령이 선녀와 함께

나타나 빨간 열매가 달리고 뿌리는 사람 모양과 흡사한 약초를 주며

"모후산 동북쪽 기슭에 이와 같은 영약이 있으니 남편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라"

하고 생시와 같이 선명하게 이야기하였다.

 

그것을 받으려는 순간 신령은 온데 간데 사라져 버려 너무 허망한 꿈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남편을 살려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모후산 동북쪽 산기슭을 헤매던 중 영명하게도 꿈에서 본 약초를 발견하여

조심스럽게 뿌리를 캐고 종자까지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뿌리를 정성껏 달여

남편에게 먹이니 신기하게도 병이 완치되었다.

 

그 후 여인은 종자를 파종 재배 하여 이를 점점 확장한 결과

큰 부자가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한국인삼공사)

 

이러한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 약초를 사다가

병자에게 팔아 돈을 받아 이득을 많이 보았다고 하며 그 가운데 개성사는

사람이 오랫동안 다니면서 재배하는 것을 보고 돌아가 개성에서 재배하였다고 한다.

 

또 고려 현종 숙종(1094~ 1105) 때 동복 모후산에서

인삼을 인공재배하기 시작하여 효능이 탁월해 궁중에서 이 인삼을 달이면

향기가 궁궐안에 가득하여 동복에서 생산된 인삼을 '福蔘(복삼)'이라 명명하였다.

 

그래서 이 고장의 진상품인 福靑(복천), 福川魚(복천어)와 함께

三福(삼복)고장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同福男德院碑(동복 남덕둰 비각 전경]

 

동복에 있었던 남덕원은 독상리 제궁동 입구 금계산 기슭에 있었던

역원으로 인근 한천리에 검부역이 생기면서 폐지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검부역이 언제 설치되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어 남덕원의 폐지연대도 추정이 불가능하다.

 

[동복남원덕비 안내판 전경]

[동복남원덕비 안내판 글 내용]

[동복남원덕비 안내판 영문 글 내용]

[同福男德院碑(동복남원덕비)]

 

전체 높이는 320cm, 폭은 130cm, 두께는 위 14cm·아래 23cm이다.

비석은 거친 사암질 자연석이고 비문은 8행으로 새겨져 있다.

비문 내용 중 심지헌 이란 인물이 있어 확인 결과 그는 동복현감을 지냈는데

1666년 9월에 부임하여 1668년 7월에 이임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비석의 건립 연대 또한 무신년 3월인데 이임하기 전 심지헌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을 쓰고 전각글씨를 새긴 사람은 광산김씨 김진도인데 그가 누구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9호(1999년 2월 26일)로

지정된 이 驛院(역원) 碑(비)는 조선 현종 8년(1668) 3월에 건립되었다.

 

[항일 독립투사 송계 鄭太鳳(정태봉) 선생 기적비]

[항일 독립투사 송계 鄭太鳳(정태봉) 선생 기적비 글 내용]

 

鄭太鳳(정태봉, 1893~1944) 선생은 화순군 동복면 칠정리 동정마을 279번지에서
아버지 동래 정공 기열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3남중 2남으로 1893년 5월 20일 출생하였다.

 

선생은 6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학문을 더 넓히기 위해
13살 되던 해 숙부를 따라 승광사에서 수학하는 도중 만해 한용운 선생을 만나 위국진충이란

가르침을 받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하던 공부를 버리고 15세 때 결혼을 하였으나 가정을 돌보지 않고

1908년부터 신문학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10여년간 각처의 의사를 규합 구국운동에만 전념하다

 

경성고등법원의 3심판결을 받고 징역 3년이 언도 되어 옥고를 치루고 출소 후

상경하여 민생아 활동을 하다가 좌파의 모략으로 신간회가 해체되어 공은 북경 상해

만주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치안유지법위반 및 공갈미수죄로 체포되어 5년형이

언도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대구 형무소 복역 중 1000여명의 죄수를 봉기 시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한 주동자로 6개월간의 독 감방생활을 하여 갖은 고역을 당하면서도 끝내 굴복치

아니하고 출옥하였으나 일정의 감시가 심하고 병세가 위중한 몸으로 본적을 신의주로

전적하고 구국동지를 재 규합하려고 만주에 잠입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조국 광복의

찬란한 해를 보지 못한 채 1944년 향년 51세의 나이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으며

외아들 대운과 그의 처 안동김씨 사이에서 아들 재선과 승태 그리고 영숙 혜숙 혜경 영숙의

네 딸이 있으며 묘지는 동복면 유천리 산 242번지에 안장 되어있다.

 

1977년 독립운동가로 건국포장이 1990년 애국장이 추서 된 우리 고장의 훌륭한 애국 투사이시다.

(위 기적비 글 내용 옮겨 적음)

 

[광주학생 독립운동가 송고 홍귀주 선생 기적비]

[광주학생 독립운동가 송고 홍귀주 선생 기적비 글 내용]

[중요인간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송추만 선생 기적비]

 

小木匠(소목장)이란 목재로 세간들을 만드는 기능자를 말한다.

대목장이 가옥이나 절 등 건축물을 제작한다면 소목장은 欌籠(장롱),

櫃函(궤함) 등을 비롯하여 文房具(문방구) 등 세간들과 각종 농기구 및

수레, 가마 등 일반 생활 용품을 만들어 왔다.

 

소목장은 목가구의 제작과 건축상의 소목 일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 초기까지 소목장들은 주로 왕실과 상류 계층의 수요로 목가구 등을

제작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그 종류도 다양해져

지역별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해방 이후 국가에서는 소목장을 비롯하여 사라져 가는

전통 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해 여러 장인들을 기능 보유자로 지정하였다.

 

이 중 소목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로 1975년 千相源(천상원)이

처음으로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宋樞萬(송추만). 姜大圭(강대규).

鄭敦散(정돈산). 薛石鐵(설석철). 朴明培(박명배). 嚴泰祚(엄태조) 등이

차례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기묘사화의 명현 신재 崔山斗(최산두) 선생 유허비]

 

본관 光陽(광양). 자 景仰(경앙). 호 新齋(신재). 籠中子(농중자). 蘿葍山人(나복산인).

아버지는 한성판윤 崔漢榮(최한영)이며, 어머니는 교리 韓敬澮(한경회)의 딸이다.

金宗直(김종직). 金宏弼(김굉필)을 사숙하였다.

 

6세 때 글을 배우러 다니다가 하루는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는데, 도깨비가 그를 '舍人(사인)'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15세 때 '通鑑綱目(통감강목)' 80권을 가지고 石窟(석굴)에 들어가서

2년간 수천 번을 읽고 나오니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18세에 상경하여 趙光祖(조광조). 金淨(김정). 金安國(김안국)

등과 교유하니 당시 사람들이 '洛中君子(낙중군자)'라 하였다.

 

연산군 10년(1504) 생원이 되어 25세에서 30세까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여

도덕. 문장으로 이름이 나자, 金麟厚(김인후). 柳希春(유희춘) 등이 찾아와서 글을 배웠다.

 

중종 8년(15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4년 홍문관저작,

1516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다시 수찬이 되고 보은현감이 되었다.

 

승정원에서 '性理大全(성리대전)'을 강할 사람 26인을 선발하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1519년 이조정랑. 장령. 사인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풀려나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柳成春(유성춘). 尹衢(윤구)와 함께 '호남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新齋集(신재집)'이 있다.

동복의 道源書院(도원서원)에 제향되었다.

 

[동복의 소리 대금산조 명인 한주환 선생 기적비]

[동복의 소리 대금산조 명인 한주환 선생 기적비 글 내용]

[동복남원덕비각 전경]

 

남덕원비의 문화재적 가치는 조선시대 교통시설이자

공공기관이었던 역원과 관련있는 원비로서는 유일하다는 점,

 

17세기에 거친 자연석에 새겨진 행서가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

그리고 건립연대가 확인된 점 등이다.

 

[동복남원덕비각쪽에서 담은 앞 전경]

[동복한천 농악 걸립 굿(액막이) 두레 굿(농사굿) 군악굿(진굿) 등 안내 비]

[동복남원덕비각과 주변 전경]

 

'옛 이야기가 있는 쉼터 同福(동복)'

소공원의 동복남원덕비각과 주변 소개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