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0. 05:53ㆍ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금포리 1313
[達城郡廳(달성군청) 內(내) 頌德碑郡(송덕비군) 전경]
지난번 2020년 쥐띠해를 맞이하여 달성군청내 갤러리에서
'십이쥐 展'을 개최하였다기에 들렸다가 함께 담아 온 달성군청 정원 뜰의
여러종류의 24기의 송덕비군을 담아와서는 이때껏 소개가 미루어졌습니다.
오늘은 그때 못해드린 달성군쳥 내 송덕비군을 소개해드릴까합니다.
혹 '십이쥐 展'을 함께하시지 못하신 이웃님들이 계신다면
요기 클릭하셔서 둘러보셔요.^^
[碑身案內文碑(비신안내문비) 전경]
[碑身案內文(비신안내문) 내용]
[達城郡廳(달성군청) 內(내) 頌德碑郡(송덕비군) 전경]
[達城郡廳(달성군청) 內(내) 頌德碑郡(송덕비군) 안내판]
이 비석들은 본래 현풍면 성하리에 소재한 달성군민체육관 옆에 있던 것들이다.
1977년 구마고속도로로 공사 때 성하리 '구쌍산' 일대에 남아 있던 비석들과 옛 관아
입구인 현풍면사무소 도로변 '비석걸이'에 남아 있던 비석들 총38기를 속칭 '공들고개'라
불리는 달성군민체육관 옆에 모아 두었는데, 이를 2016년 7월경 달성군청 내로 옮긴 것이다.
옮겨 오기 전의 모습 그대로 연대별 관직별로 비석을 배치하고 표석을 설치하였는데,
제1비석군은 순찰사. 관찰사. 제2~4비석군은 현감. 제5비석군은 군수. 그리고 기타
비석군은 찰방. 참봉. 금부도사 등의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1977년 처음 정비할 당시보다 4기의 비석이 추가되어 표석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또한 명칭이나 건립연도가 불명확하거나 표기에 오류가 있는 경우도 있어 앞으로 고증이
더 필요하다.
이 곳에 있는 42기의 명칭과 건립연도는 다음과 같다(연번은 배열순서에 따름)
<안내판 윗쪽 안내글 옮겨 적음>
순서대로 담아와서 소개합니다.
[좌측부터 이용익 비 / 엄세영 비 / 서기순 비 / 조강하 비 / 이근필 비 / 김도희 비 / 서희순 비 전경]
우측부터
1. 순상국 서희순 영세불망비(巡相國徐公諱熹淳永世不忘碑) 1941년
2. 순상국 김도희 영세불망비(巡相國金公諱道喜永世不忘碑) 1841년
3. 순상국 이근필 영세불망비(巡相國李公諱根弼永世不忘碑) 1881년
4. 순상국 조강하 영세불망비(巡相國趙公諱康夏永世不忘碑) 1884년
5. 순상국 서기순 애민선정비(巡相國徐公諱箕淳愛民善政碑) 1851년
6. 관찰사 엄세영 청덕불망비(觀察使嚴公世永淸德不忘碑) 1898년
7. 관찰사 이용익 애민선정영세불망비(觀察使李公諱容翊愛民善政永世不忘碑) 1905년
[비석군 전경]
[좌측부터 구문유 청덕애민비 / 구문유 선정비 / 오위주 애민비 / 이세갑 거사비 / 박정 선정비 전경]
우측부터
8. 현감 박정 선정비(縣監朴公諱淳善政碑) 1647년
9. 현감 이세갑 거사비(縣監李候世甲去恩碑) 1682년
10. 현감 오위주 애민비(縣監吳候緯周愛民碑) 1721년, 1759년 재건
11. 현감 구문유 선정비(縣監具候文游善政碑) 1697년
12. 현감 구문유 청덕애민비(縣監具候文游淸德愛民碑) 1696년
[좌측부터 김두흠 청덕선정비 / 김두흠 애민선정비 / 심교진 애민선정비 / 김광태 유애거사비 / 홍우한 애민선정비 전경]
우측부터
13. 현감 홍우한 애민선정비(縣監洪候禹한愛民善政碑) 1716년
14. 현감 김광태 유애거사비(縣監金候光泰遺愛去恩碑) 1760년
15. 현감 심교진 애민선정비(縣監沈候敎鎭愛民善政碑) 1851년
16. 현감 김두흠 애민선정비(縣監金候斗欽愛民善政碑) 1856년
17. 현감 김두흠 청덕선정비(縣監金候斗欽淸德善政碑) 1857년
[비석군 전경]
[비석군 전경]
송덕비란 벼슬에 오른 관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모범을 보이는 등 어진 정치를 펼친 관료의 공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세우는 비석이라고 합니다.
주를 담당하는 고위관리가 관료가 세운 공을 심사한 후
왕의 허가를 받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관료들은 백성을 수탈해 억지로
비석을 세우거나 자비를 들여 세우기도 했다 합니다.
이곳의 碑(비)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워진 碑(비)가 없었으면 합니다.
[좌측부터 김화식 애민선정비 / 민종열 청덕선정비 / 정기태 영세불망비 / 정기태 청덕선정비 / 이휘승 청덕선정비 전경]
우측부터
18. 현감 이휘승 청덕선정비(縣監李候彙承淸德善政碑) 1863년
19. 현감 정기태 청덕선정비(縣監鄭候基泰永世不忘碑) 1874년
20. 현감 정기태 영세불망비(縣監鄭候基泰永世不忘碑) 1881년
21. 현감 민종열 청덕선정비(縣監閔候鐘烈淸德善政碑) 1883년
22. 현감 김화식 애민선정비(縣監金候華植愛民善政碑) 1898년
[비석군 전경]
[좌측부터 허탁 영세불망미 / 홍우한 선정비 / 이광진 선정비 / 노진정 거사비 / 김세렴 선정비 전경]
우측부터
23. 현감 김세렴 선정비(金候仁政碑) 1636년
24. 영장 [노진정] 거사비(營將[盧公盡定]去恩碑) 1837년 추정
25. 이광진 선정비(李候光鎭善政碑) 1657년
26. 홍우한 선정비(洪候禹翰善政碑) 1713년
27. 성현찰방 허탁 영세불망비(省峴察訪許候諱鐸永世不忘碑) 1853년
[비석군 전경]
'碑林(비림)'이라는 말이 있다 합니다.
비석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공간을 숲에다 비유한 표현이라 합니다.
대구광역시에도 여러 곳에 비림이 있다.
경상감영공원. 달성군청. 고산초등학교.
경북대학교 박물관. 칠곡향교의 비림 등이 그것이다.
이중 규모가 가장 큰 비림은 달성군청 앞마당에 조성된 비림이다.
경상감영공원 비림에 29기의 송덕비가 있는 반면 달성군청 비림에는
무려 42기의 송덕비가 있기 때문이다.
[좌측부터 신현구 애민선정비 / 백남준 애민선정비 / 이병홍 애민선정비 / 홍필주 청덕선정비 / 홍필주 송덕영세불망비]
우측부터
28. 군수 홍필주 송덕영세불망비(郡守洪弼周頌德永世不忘碑) 1898년
29. 군수 홍필주 청덕선정비(郡守洪弼周淸德善政碑) 1900년
30. 군수 이병홍 애민선정비(郡守李公秉弘愛民善政碑) 1901년
31. 군수 백남준 애민선정비(郡守白候南峻愛民善政碑) 1905
32. 군수 신현구 애민선정비(郡守申公鉉求愛民善政碑) 1931년
[비석군 전경]
송덕비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과천현감이 임기를 마치고 고을을 떠나는 날,
자신의 송덕비에 뭐라고 새겨져 있는지가 궁금했다.
몰래 장막을 들추고 들여다보니 비에 다음과 같이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今日送此盜(금일송차도)'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
현감은 헛웃음을 한 번 짓고는 그 옆에다
'明日來他盜(명일래타도)' 내일 또 다른 도둑놈이 올 것이로다.
5글자를 새겨 넣고 고을을 떠났다.
그러자 한 고을 아전이 그 옆에다 5글자를 더 새겨 넣었다.
'此盜來不盡(차도래부진)' 이놈의 도둑놈들은 끝이 없구나.
며칠 후 송덕비 앞을 지나던 한 선비가 비문을 읽어보고는
또 다시 5글자를 더 추가했다.
'擧世皆爲盜(거세개위도)' 세상에는 도둑놈들 뿐이구나
그렇다고 이곳에 세워진 碑(비)가 그렇다는건 아닙니다.
[좌측부터 본면서원 고상찬 영세불망비 / 행의금부도사 이선형 적덕영세불망비 / 참봉 서상민 송덕비 / 행성현찰방 김종경 선정비]
우측부터
33. 행성현찰방 김종경 선정비(行省峴察訪金宗敬善政碑) 1783년
34. 참봉 서상민 송덕비(參奉徐公相敏頌德碑) 1954년
35. 행의금부도사 이선형 적덕영세불망비(行義禁府都事李公善炯積德永世不忘碑) 1835, 또는 1895년
36. 본면서원 고상찬 영세불망비(本面書員高相瓚永世不忘碑) 1864년
[좌측부터 현풍면장 곽지홍 영세기념비 / 유학 박도인 시혜불망비 / 사령 이만수 시혜불망비]
우측부터
37. 사령 이만수 시혜불망비(使令李萬樹施惠不忘碑) 1903년
38. 유학 박도인 시혜불망비(幼學朴道仁施惠不忘碑) 1913년
39. 현풍면장 곽지홍 영세기념비(玄風面長郭芝洪永世紀念碑) 1918년
[비석군 전경]
[좌측부터 서철규 시혜비 / 수철원교비 / 곽지홍 영세기념비]
우측부터
40. 군주사 곽지홍 영세기념비(郡主事郭曺坤善政碑) 1918년
41. 수철원교비(水鐵院橋碑) 1761년
42. 서철규 시혜비(徐公喆圭施惠碑) 1924년
[비석 군 전경]
전통놀이 중에 비석치기놀이가 있다.
작은 돌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뒤 다른 돌을 이용해
서 있는 돌을 쓰러뜨리는 놀이다.
비석치기놀이의 유래는 크게 '碑石(비석)'과 비석(飛石)’으로 나뉜다.
전자는 길가에 세워져 있는 고을수령들의 송덕비를 고깝게 여겨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진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해석이고, 후자는 비석돌을 향해 날아가는
돌[飛石]에 방점을 둔 해석이라 합니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를 떠나 전자와 같은 유래설도
있다하니 비림을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지만,
선정을 베풀어 자진하여 그 덕을 기리기위해 세운 碑(비)들도
많을거에요. 그분들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오해는 버리고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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